나와 아버지 中 - 옌렌커

김계희
2017-12-19
조회수 945



도시 사람들은 ‘세월’을 ‘삶’이라고 부르고 시골 사람들은 ‘삶’을 ‘세월’이라고 부른다. 얼핏 보기에는 이것이 동일한 인생의 상태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에 불과한 것 같지만, 그 근본적인 의미의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처럼 멀기만 하다. ‘세월’이 담고 있는 의미는 ‘하루 또 하루, 매일 같은 모습’이라 단조롭고 무미하며 어쩔 수 없는 인생의 소모 상태이다. 게다가 사람들에게는 이를 변화시킬 힘도 없다. 반면에 ‘삶’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은 대단히 풍부하고 다채롭다. ‘삶’은 컬러이고 활기가 넘친다. 드넓은 도로가 있고 밝고 환한 가로등도 있다. 어쩌면 우린 평생 공원에 가지 않고 도서관에도 가지않 으며 수영장에 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도서관과 수영장 그리고 폐기되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공원은 우리의 삶 속에 의연하게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삶’은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설사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더라도 인간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세월’은 죽어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영원히 변화시킬 수 없을 것 같아 보인다. 그렇지 않은 상황과 사실이 수없이 많긴 했지만 과거의 모든 왕조를 통틀어 대대손손 그래왔던 것 처럼 느껴진다. '삶’에게 있어 ‘세월’은 일종의 결핍이자 우매함이라고 할 수 있고, ‘세월’에게 있어서 ‘삶’은 일종의 지향이자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세월’이 드넓은 산야에 버려져 영원히 고생만 하는 황량한 바위라면 ‘삶’은 주도면밀하게 양육되고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초목이라고 할 수 있다. ‘세월’이 한 포기 풀이라면 ‘삶’은 한 송이 꽃이고 ‘세월’이 한 그루 나무라면 ‘삶’은 도시거리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어 사계절 내내 푸르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공원이라 할 수 있다.
‘세월’에 직면하면 칼과 도기를 마구 휘둘러서 나무나 풀을 닥치는 데로 찍어내듯 과감하고 대범하게 욕망에 충실하게 된다. ‘삶’이 우리 이 사회의 친아들이라면, 세월은 ‘삶’이 이 사회에 계부가 양육하는 다소 통속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삶’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항상 자유롭고 화려하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만 먹는 예쁜 딸인데 비해서 ‘세월’은 오리려 부모들이 의지하는 항상 외지로 나가서 일을 해서 부모를 위해 돈을 벌어와야 하는, 언제나 평범하고 진실하게 자기의 본분을 다하는 아들이다.
(......)
그리하여 ‘삶’은 일종의 가벼운 즐거움이 되고 맑은 아름다움이자 기대가 되겠지만, 세월은 무거움과 괴로움, 하루 또 하루 끊임없이 반복되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선택의 여지도 없는 무료함과 어쩔 수 없음이 되는 것이다. p. 254



엔롄커의 자전적 에세이집 <나와 아버지>는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굶주린 가족의 생계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아버지와의 회상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 시대 농민들에게 삶이란 어떤 고단함이었는지,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세월의 무거움과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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