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와 미술-1


몬테뇰라의 집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3살 때 어떤 그림이 인도에서 온 것인지, 중국에서 온것인지도 알 정도였다. 헤세 아버지는 5살짜리 어린 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이 아이는 모든 방면에 재능이 뛰어난 것 같다. 달이나 구름을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했더니 어느새 오르간을 즉흥적으로 치고 있고, 붓이나 펜으로 아주 깜짝 놀랄만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마음이 내키면 정말 깊이 빠져 노래를 하기도 한다. 게다가 운을 맞추는 데도 실패한 적이 없다." 8살 때도 "크리스마스나 생일 때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성문만큼 큰 종이"였다.  헤세 자신은 "40이 되던 해부터 갑자기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고 회고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13세 때 " 작가가 아니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고 그의 진로를 결정한 마울브론 신학교 시절에도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나  『데이비드 커퍼필드』의 주인공들을 연작삽화로 그리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가 "40이 넘어서 갑자기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라는 말이 실제로 그가 나이 40에 처음으로 붓을 잡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동안 간간히 그림을 그려왔는데, 나이  40이 되어서 내적 외적인 동기가 주어져서 본격적으로 그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은 시기에도 그는 한스 슈투르츠네거 같은 화가와 인도여행도 갔고 실패한 결혼생활을 하는 화가를 소재로 한 『게르트루트』도 썼다. 그 후 헤세는 그의 삶 가운데 절반을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그는 그림이나 화가와 관련된 많은 작품, 예를 들어 『클링조르의 마지막 여름』, 시화집, 그림동화집, 화집, 화가인 고흐, 뵐티, 모르겐탈러의 평전과 화가 친구인 쿠노 아미에트의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 등을 써 주었으며, 그의 그림을 전시하여 생계를 이어 가려고 했다.

헤세가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작가로서의 그의 생활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향수』를 써서 일약 유명한 작가가 되었고 서점원에서 직업작가의 길을 갈 수 있었는데, 전쟁이 터져서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헤세는 철두철미한 반전작가였다.
그는 신문과 잡지에 「다시 독일에」, 「오, 친구여 제발 그런 음조로 노래하지 마오!」라는 글을 발표하여 독일과 독일민족에게 신랄한 비평의 독화살을 쏘아댔었는데, 쾰른 일간지는 「어떤 독일작가」라는 글로 그를 "조국 없는 놈", "징집 기피자", "재빨리 조국 독일의 흙을 털어 버리는 자"로 매도하였고, 이 글은 거의 대부분의 독일 신문에 전재되어 그는 하루아침에 조국 독일에서 배척 당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대부분의 독자를 잃었다. 후일 그가 에밀 징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데미안』을 발표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작가로서 생계를 이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또 다른 동기는 부인 마리와의 결혼생활의 위기, 부인이 정신병을 앓게 된 것이었다. 그의 가정은 파탄을 겪었고 세 아들 가운데 큰 아들은 쿠노 아미에트에게 맡기고 두 아들은 기숙학교에 맡기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그 자신도 정신병을 앓게 되어 정신과 심리치료를 받을 지경이 되었다. 그는 심리학자 융의 제자인 랑 박사에게서 대화를 통한 심리치료와 곁들여 그림을 통한 치료를 권유받아 친구 구스타프 감퍼와 같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그 사이에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912년에는 「베른의 집」을, 1917년에는 「자화상」을 여러 번 그렸었다.
그리고 마지막 동기로는 평소부터 꿈꾸어 왔던 남쪽에 대한 동경과 그의 내적 위안의 세계를 그림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었다. 직업 화가로서 그의 길을 가기 위해서 그가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일시적인 필요에 의해,즉  전쟁포로 후원회 기금을 마련하거나 가난한 작가 후고 발을 돕기 위해, 그림 전시회를 열고 그림을 팔았지만  결코 직업적인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거나 판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림이 좋아서 그렸고, 내적 답답함을 풀기 위하여 그림 그리기라는 명상행위를 한 것이었다. 그는 1917년의 한 편지에 "내가 화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지만, 환상세계에 푹 빠져서 완전히 자기 자신을 잊는 것은 한 귀중한 체험입니다. 내가 여러 날 동안 내 자신과 세계와 전쟁과 모든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1914년 이래로 처음입니다" 라고 적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을 화가로 생각한 적은 없으며 또 그렇게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예술가적인 명예욕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기쁨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냥 자연을 좋아했고 사랑해서 그림을 그렸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것도 아니었고,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도 아니고, 시대적 예술양식에 빠져서도 아니고, 그냥 자연 속에 살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는 「수채화」라는 글에서 그의 심정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아니다. 나는 아마추어다. 그러나 이 골짜기에서 사계절, 매일, 매 시간의 얼굴을 그리고 지형의 주름을, 호수 가의 형태를, 초록 속의 기분 좋은 산책길을 나처럼 알고 사랑하고 가슴에 품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그것들을 그토록 가슴에 간직하고 깊이 체험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테신풍경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새로운 삶은 그가 베른에서 테신으로 떠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테신 풍경) 그는 1918년에 시 「화가의 기쁨」과 「화가」라는 산문을 썼고 부활절 휴가 때 처음으로 태양이 작열하는 테신 지방으로 가서 수채화를 그린 적이 있었다. 그 첫 번째의 테신과의 만남에 대한 인상이 여름사나이인 그를 죽을 때까지 붙잡아 두었다. 그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테신으로 향하였다. 「요약된 이력서」에 보면 왜 그가 더운 남쪽 테신을 선호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7월의 어느 더운 날 이른 저녁에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 때의 온도를 나도 모르게 나의 삶 동안 좋아했고  애써 찾은 것이었다. 더위가 없으면 고통스럽고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결코 추운 나라에서는 살지 못하고 내 뜻대로 하는 여행인 경우에는 이미 남쪽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 때의 심정이 「테신에서의 새 출발」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베른을 떠나는 것이 내겐 그리 힘들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나를 위해 도덕적으로 단지 하나의 생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즉, 무엇보다 집필 작업을 우선하며 아직은 그 속에 묻혀 살 수 있다는 것, 가정의 몰락도, 어려운 돈 걱정도, 그 밖의 어떤 생각도 심각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것에 실패하면, 나는 끝장이었다.
나는 루가노(스위스 테신 주州의 중심 도시로 유명한 관광지)로 가서 몇 주 동안 소렌고에 머물며 좋은 곳을 물색했다. 몬타뇰라(루가노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쯤 걸리는 작은 마을)에서 카사 카무치(사냥을 위해 지은 바로크식 성으로 궁전 모습의 건물이라고 묘사하고 있음)를 발견하고, 1919년 오월에 그곳으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의 삶은 빈궁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전에 언급한  「테신에서의 새 출발」이라는 글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이제는 빈털터리가 된 대단치 않은 시인이었다. 남루하면서 다소 수상쩍기도 한 이방인이었다. 우유와 쌀과 마카로니로 살고, 낡은 옷을 너덜너덜할 때까지 입고, 가을이면 숲에서 알밤 따위를 저녁 식사용으로 주워오는 그런 생활이었다."
이러한 궁핍한 생활 속에서 그림 그리기의 시도는 성공하였다. 그는 또 같은 글에서 "그러나 나의 실험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대를 힘들게 만든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나날은 아름답고 풍요로웠다. 오랜 세월 지속된 악몽에서 벗어난 양, 나는 자유와 공기와 태양과 고독과 일을 호흡하였다."라고 말했다.

1919년은 가장 어려운 해였으나 가장 창작 의욕이 넘치는 한 해였다. 그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둥근 중절모자를 쓰고 조그마한 접이 의자에 앉아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이 시절에 대해 그는 "힘이 넘치고 작열하는 여름, 내가 별로 체험하지 못한 유혹과 광채가 마치 독주처럼 내 몸 안에 스며들었다. 이글거리는 여름 날 나는 마을이며 밤나무 숲을 돌아다녔고 접이 의자에 앉아서 이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마술세계를 수채화로 담아내려 무척 애썼다." 라고 회상했다. 그는 이 한해에 몇 년 동안 쓰지 못했던 문학작품도 여러 편을 썼다. 『데미안』, 『클링조르의 마지막 여름』, 『클라인과 바그너』, 『어린 영혼』등의 작품을 썼다.
1919년 말 다보스에서 첫 전시회를 가질 수 있었다. (티치노 풍경1 2 3)그는 그 후 1920년 바젤, 루가노, 1922년에는 빈터투어와 라이프치히, 1926년에는 베를린, 드레스덴, 1932년에는 브레스라우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특히 1922년 3월 빈터투어 전시회에서는 표현주의 "다리파"의 거장인 에밀 놀데와 함께 전시회를 가졌는데 두 사람 다 비평가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헤세의 수채화전은 사후에도 세계 각국(미국, 일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유럽등)에서 자주 열렸고, 70년대 이후에만도 70회 이상 열렸다. 가장 최근에는  1996년에 일본전이 열렸고 (일본전 전시작품1-나무, 집, 산) (2-루가노호수와 나무) (3-숲속의 집)(여기서는 12일 동안에 23,000명이 관람),1998년에는 뉴욕전, 올해에는 스위스의 아르레스하임과 솔로투른에서 그리고 독일의 괴핑엔에서 열리고 있다.

헤세 논문 <헤세와 미술> 중에서  -홍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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