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열정

작성일 2006년

딸아이 결혼하면 병풍이나 만들어 주면 좋겠다 생각하고 사군자를 배우러 서실에 갔다가, 먹이 종이에 뿌려지던 순간 그 번짐에 깊이 감화되어 묵화에 매달리기를 삼십년. 그림이라는 걸 그려 본적도 없었지만 오로지 열정 하나로 묵화에 모든 시간과 노력을 받치신 고모님은 70이 다 되어 가시는 연세에도 그 열정은 어느 혈기왕성한 청년보다 뜨겁고 깊으시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시절 고모님은 사군자를 시작한지 10년만에 첫번째 개인전을 여셨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접한 고모님의 그림에서 받았던  충격과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내 생애 가장 감동적인 그림이 있었다면 고흐와 모네의 수련, 그리고 고모님의 작품이다. 그림을 잘 알지 못하고 묵화를 처음 대하는 나였지만 그 거대한 화폭에 펼쳐진- 대잎이 바람에 퍼드득 퍼드득 소리를 내며 날리는 그 생생하고도 흥분되는,뭐라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함 앞에서 나는 가슴이 죄어 오는 것 같았다.

나이가 많아 요즘은 학교를 그만두시고  작업에만 매진하시는 고모님은 세계 유명 화랑에서 앞다투어 초대를 할 만큼 명성을 가졌기도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되고 있는 줄도 몰랐다고, 그저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어떻게 알고 초청을 해 왔고 그러면 그저 원더풀 원더풀 찬사가 이어졌을 뿐, 그들이 뭐라고 떠들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저 웃음이 날 뿐이라고 하신다.
"그림을 그리려면 먹을 배워야 한다.먹을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림은 정신이다. 정신이 맑고 성하면 그림에 고스란히 새겨지고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다스리기 위해 힘써야 한단다."
고모님의 그림은 그래서인지 복을 부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림을 걸어두면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기고 막혔던 문제가 풀리는 등 그에 얽힌 일화는 참으로 무성하다. 그도 그럴것이 고모님의 작품에는 그야말로 청명하고 칼날같은 정신과 힘이 느껴지는데-아마도 내가 고모님의 그림에서 가장 감동한 것이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애쓰시는생활을 보면 그림이 복을 불러온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정통 사군자로 시작하여 많은 변화를 거쳐 지금은 추상으로 나가고 계신데 수천점에 달하는 작품이 담겨있는 슬라이더는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안을만큼 새롭고 역동적이다.
"난 날마다 새로운 그림을 그린단다. 중요한 것은 열정과 정신이야. 매너리즘에 빠지면 자신에게서 벗어나올 수가 없지. 수십년째 같은 것만 그릴 수 밖에. 정신을 열어놓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단다. 특히나 묵화는 전통이 있어서 거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단다. 한번 좋았던 것이라고 그것에 집착을 가지면 않된다. 그러한 집착은 명성에 관한 집착과도 같지. 난 내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몰랐단다. 어느날 밖으로 나와 보니 그렇게 되어 있더구나. 그래도 서실로 돌아오면 난 모든 걸 잊는다.사람들은 떠들어 대지만 난 그게 무언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단다. 그저 매일매일 시도하는 것이 재미있고 아직도 그리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을 뿐... 나쁜짓을 하지 마라 .정신이 성가시게 될일은 아예 돌아보지도 말아라. 명성이나 찬사에도 눈돌리지 말아라. 그저 너는 네 안의 것들에만 전념하면 되는거야."

먹이 종이에 뚝 떨어질 때, 그 번짐에 사로잡혀 모든 순정을 받쳐온 세월,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처음 서실에 갔을때 저 여자가 뭘 하겠냐는 눈총에도 그저 자신의 기쁨에 신이난 채 살아온 세월... 돌아오는 길에 고모님은 나에게 줄 그림과 부채를 챙기시며 말씀하신다.
"네가 행복한 그림을 그려라.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그 그림을 보며 행복해 할수 있단다..."



샌디에고 / 소연 김영자 휘호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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