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2025 페인팅레이디 동화달력 <우리, 은빛의 시간들>

김계희
2024-11-26
조회수 125

        

 Schumann-Träumer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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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당신의 오랜 순례를 마치고, 당신을 기다리던 은빛 시간 위에 도착하셨나 봐요.
당신이 지나온 모든 순간이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세계에 도착하셨나 봐요.

언제나 청년 같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아흔이 넘은 아버지를
한 번도 노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일 년 만에 아버지는 하얀 할아버지가 되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만났어요.
어쩌면 따뜻한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나와 엄마와 아버지는 다시 만났어요.

 



아버지는 오랜 순례를 마치고, 당신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둘러보고 싶으셨나 봐요.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영화처럼
당신의 화려했던 시절 속으로 돌아갈 때면 아버지는 참 행복해 보여요.
그곳에는 당신이 설계한 아름다운 일본풍의 집이 있고,
검고 거대한 전나무가 있고, 아버지는 멋진 세단을 타고 마당을 빙빙 돌아요.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오던 날, 나는 밤새 잠이 오지 않고,
아버지의 마른 등위로 번지는 들의 소리를 들어요.
밤새 그치지 않는 빗물 소리, 들에 불어 넘치는 강물 소리,
뿌연 나방의 날갯짓 소리, 사과나무 잎사귀가 마르는 소리를 들어요.
그리고 당신처럼 힘든 삶을 살지 않게 하려고 우리에게 혹독했던 당신의 냉정함을 들어요.

내가 몸져눕던 어린 날, 나를 일으켜 세워 이십오리 길을 자전거로 달리게 하던 엄격함을 들어요.
살을 에는 칼바람을 맞으며 눈 덮인 오르막을 끝도 없이 달리게 하던 냉정함을 들어요.
학교에 도착할 무렵 일손을 태우러 가는 아버지의 차가 쌩하고 내 옆을 지나갈 때,
아버지가 미웠던 나의 마음을 들어요.




어느 날 방죽 아래로 굴러 손목을 접질렸을 때,
아버지는 한 손으로도 자전거를 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차라리 큰 병에 걸리기를 바랐던 나의 바람이 거짓말처럼 이루어져
걸으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이상한 병에 걸리고 말았을 때,
아버지는 공부하려면 체력이 강해야 한다며 차를 태워주지 않는 건 여전했어요.
결국 아버지의 차를 넘겨다보는 것은 단념하게 되었고, 거짓말처럼 나의 병도 나았죠.




아버지는 성적순으로 자식을 사랑했고, 우리가 자란 후에는 연봉 순으로 사랑하셨죠.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건 아버지에게 없는 말이었어요.
대학에 들어가자 경제적 지원을 끊으셨고,
작업실에 불을 내 건물을 다 태워 버렸을 때도 도움을 주지 않았지만,
내가 좋은 것을 할 때 아버지는 늘 좋아했어요.
내가 꿈을 말할 때, 팔리지도 않는 달력을 밤새워 만들 때,
마침표 하나가 빠진 달력을 모조리 폐기하고 다시 인쇄했을 때, 아버지는 좋아했어요.
무언가 멋진 것, 우리는 그런 걸 좋아했어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혹독할 때, 우리는 자신이 좋았어요.
아버지의 조건적인 사랑은 어쩌면 그런 ‘좋은 것’들과 연결되었는지 몰라요.




아버지는 그 ‘좋은 것’을 위해 많은 도전을 했고, 성공을 했고, 그만큼 실패를 했어요.
아흔이 넘어서도 오래전 잃어버린 그 집을 다시 짓기 위해 설계도를 그리셨죠.
아버지는 혼자 살지만, 방은 네 개가 필요해요.
온 방에 환하게 불을 켜놓고 가끔 이방 저방 문을 열어 보는 걸 좋아해요.
우리는 오랜 시간 반목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밤새도록 나눌 수가 있었죠.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멋지고 좋았어요.
농장을 일구고 처음 시도한 작물이 덩굴을 타는 이상한 열대 과일인 것도,
아무도 심지 않던 블랙커런트를 재배하고, 유통할 곳을 찾지 못해 모조리 폐기할 때도 좋았어요.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땅은 조각조각 팔려 나갔지만,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버지를 좋아했을 거예요.




당신의 길고 아름다운 손톱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해요.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고 자신만의 열망을 위해 살았으면 좋았을 삶을 생각해요.
젊은 나이에 성공해 호사를 누렸지만, 어느 날 그 모든 게 사라졌을 때,
당신과 맞지 않는 사람과 매일 다투며, 원하지도 않던 자식들이 줄줄이 딸린 현실과 마주했을 때,
그 삶이, 그 의무가, 얼마나 힘겹고 성가셨을까 생각해요.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가 자신의 열망을 위해 살기를 바라셨을 거예요.
그런 아버지가 늦잠 자는 자식이 지각하지 않게 차로 태워서까지 등교시킬 필요는 없죠.
술만 마시고 노는 자식이 친 사고를 대신 처리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밥을 안 먹으면 기다렸다가 또 차려주고 차려주는 엄마가 되어서는 안 되죠.




간혹 아버지는 말씀하셨어요.
“혼자 살 수 있으면 결혼은 하지 마라. 해야 한다면 아이는 낳지 말고,
아이를 낳게 된다면 더 좋은 나라에 가서 살거라.”
어쩌면 아버지도 나를 이해하고 있었을지 몰라요.

이 지상의 시간은 너무나 느려요. 모든 걸 천천히, 아주 느리게,
하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느끼도록 설계되었죠.
그리고 그것들을 우리는 모두 해석해 내야 해요.
우리는 이곳에서, 이 끝나지 않는 고뇌의 시간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기다리고 있는 더없이 고귀한 무언가에 도착하려고 해요.

 



내 팔에 의지한 채 걷는 아버지는 잠시 또 당신의 화려한 시절로 돌아가세요.
“오래전에 네 집을 사두었는데, 내가 기억 상실증이 걸려서 거기가 어딘지 잊어버렸어.
내가 죽거든 그걸 찾아서 이제는 편하게 살아라.”
“방은 네 개겠네요.”
“네 개지.”
“불을 환하게 켜놔야겠네요.”
“환하게 켜놔야지. 혼자 살면 심심하니까 이 방에서도 자고 저 방에서도 자야지.”

바람이 불고, 당신은 웃고, 나는 이 삶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시는 함께 앉아 웃을 수 없을지 모를 이 순간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약한 새가 매의 먹이가 되던 치열한 육신의 시간을 마치고,
아버지는 맑은 미소만이 남은 세계에서
평화로운 꿈을 꾸는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계세요.

자식에게 조건적이었고, 행복한 가정을 일구지는 못했지만,
평생토록 당신 가슴을 쥐고 흔들던 열망과 의지와 힘찬 실패들은,
우리에게 멋진 영감과 삶을 주었어요.
우리가 지나온 가족의 시간은 고통이 대부분이었을지 모르나,
우리 삶이 더 쉬웠다고 해서 그 삶이 더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방죽 아래로 굴러 손목을 접질렸을 때 나는 열세 살이었어요.
자전거가 나는 듯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억새밭 위로 오리 떼가 푸드덕푸드덕 날아올랐어요.
강엔 얼음이 얼기 시작하고, 나는 ‘죽는구나!’ 생각했어요.
눈을 떴을 때, 저녁 빛에 빛나는 수만 송이의 억새가,
눈이 부시게, 눈이 부시게, 반짝였어요.
무릎에는 피가 번지고, 머리 위에는 흐릿하게 빛을 품은 흰 것들이,
그게 아름다워서, 나는 눈물을 터트렸어요.
그리고 절룩거리며 일어나 체인을 다시 바퀴에 감고 페달을 밟았어요.
등 뒤로 마른 억새꽃이 풀풀 날리고,
저녁 빛을 품은 구름이, 강물이 찬란하게 반짝였어요.




Epilogue

“아버지 무슨 생각을 하세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
“매일 누워만 있으니 심심하시죠?”
“아니야. 너무 행복해서 하루하루가 지나는 게 안타까워.”
“무엇이 그렇게 행복하세요?”
“모든 게, 모든 순간이 다 행복해.”

고되고 지난한 삶인 줄로만 생각했던 아버지의 삶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이미지와 소리의 조각들로 기억되고 있음에
감미로운 슬픔과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이런 글로 시작합니다.
"노먼, 언젠가 준비가 되면 가족 이야기를 써보렴.
무슨 일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알게 될 거야."

열두 페이지에 담을 수 없는 우리의 이야기를 쓰고 또 쓰고,
가장 마지막에 남겨질 말을 찾기 위해 지우고, 지웠습니다.
오랜 세월의 끝에서, 우리 삶의 고통과 맞닿아 있는
순결함의 일치가 너무도 완벽하여 경이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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