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2026 페인팅레이디 동화달력 <용기를 주고, 외롭지 않게>

김계희
2025-11-26
조회수 154


                                                                                       faedbe3585379.png André Gagnon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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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비가 내려요. 세상을 삼킬듯한 폭우예요.
양철 지붕 위로 퍼붓던 어린 날의 빗줄기처럼,
고무대야에 나를 싣고 물을 헤쳐 가던 그 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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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우리는 여행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풀빵같이 쪼글해진 손금을 펼치면 우리가 찾는 땅의 지도가 보였죠.
찢겨 펄럭이는 엄마의 소맷자락이 항해선의 깃발 같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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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겨울 새파랗게 언 추운 손이 있어서,
나는 길거리에 좌판을 편 노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요.
겨울 새벽 신발도 없이 눈길을 걸어간 뒷모습이 있어서,
나는 슬픔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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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 어쩌지를 못해, 요동치는 내 팔을 부둥켜 잡으며,
저절로 푹 무릎이 꺾어지며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
아득하고 캄캄하게 모든 것이 끝인 듯한 그 눈동자가
엄마의 삶이었다는 걸 알아서,
나는 절망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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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굣길, 달이 아니었으면 칠흑일 방죽길을 걸으면
엄마인 줄 알아차리라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흔들흔들 나를 향해 걸어오는 불빛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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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죽길 중간에서 만나 함께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 마음 어찌할 수 없어 서럽고도 애틋한 방죽길을 말없이 걸으며,
나는 설움이라는 게 차라리 꿈길처럼 아늑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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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엄마가 아무렇지도 않게 노래를 하면,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 부르고,
소쩍새 울음만 가득한 그 세상엔 엄마와 나, 둘 뿐이었어요.
아무도 모르고, 알 수 없고,
그냥 우리만이 서로를 조용히 아는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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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대부분의 것들-
알아야 하는 것, 알 수 없었던 것,
그리고, 알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알게 된 건, 엄마 때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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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바닥에 닿으면 무언가 치유 같은 것,
석류꽃같이 빨갛게 눈물겨운 것.
허공에서 내 몸을 붙잡아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도, 엄마 때문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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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이 아니어도,
당신 귀로 듣던 소리. 당신 눈으로 보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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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기억을 잃어 가는 당신과
저 멀리 빛나는 당신의 백야를 향해 걸으며
당신이 떠나왔던 세상을 나는 처음으로 알 것 같아서,

엄마, 나는 꿈을 꾸나 봐요.
흰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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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기를 기도해요.
우리가 망각의 강을 건너 그 모든 기억을 잃게 되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단 하나의 기억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용기를 주고, 외롭지 않게,
다음번엔 내가 엄마를.



Epilogue

아직도 꿈결 같은 방죽길을 말없이 걸으며,
마분지처럼 딱딱해진 당신 어깨 위로
아직도 비가 내리고,
내 팔에 기댄 가슴에서 스며오는
고요한 습기.

그리하여 눈이 내릴 때,
당신의 전 생애를 껴안던 이해할 수 없던 사랑을
나는 이해하게 되리니.


당신의 찬란한 백야 앞에
가슴을 굽혀 엎드리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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