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페인팅레이디 동화달력 <엄마의 나라에서>가 나왔습니다.

김계희
2023-12-03
조회수 391

                   

 정재형-사랑하는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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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을 나오자 쏟아지는 빗줄기에 수건과 런닝을 머리에 쓰고 집으로 걷는다.
“비를 맞으니까 시원하고 좋구나.”
엄마는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택시를 타지 않아서 좋은 걸 거야.
그래도 이제 엄마가 좋은 걸 해주려고 해.

 

 


몇 년 만에 떠난 여행에서, 그 겨울 바닷가에서, 엄마는 기억을 잃었다.
머리의 한쪽 기능을 잃은 엄마는 글씨와 숫자를 잃었고, 버스를 타는 법을 하루 만에 잃어버렸다.
현관문의 번호를 누르지 못해 추운 마당을 서성이는 엄마의 차가워진 뺨을 어루만지며 나는 생각했다.
‘이제부터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면 돼.’
그리고 나는 하루 만에 다른 사람이 되었다.

 



엄마의 엄마가 되기 위해, 나는 택시 타기를 그만두고 바퀴 달린 엄마의 가방을 끌고 처음으로 전철을 탄다.
때로는 한 시간이 걸려 서문시장에 도착하면, 엄마의 중요한 볼일이 에프킬라를 사는 거였음에 충격을 받기도 하지만,
동네보다 칠백원이 싼 에프킬라 때문에 택시를 타서는 안 되는 엄마의 논리는 완벽한 수학이어서,
엄마가 정말 숫자를 잃어버린 게 맞는지 의구심 위로 문득 희망이 피어오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졸도할 것 같은 폭염을 헤쳐 살이 부러진 양산 하나를 수리하고
에프킬라 세 통을 사서 돌아오면 이 비효율적인 현실이 혼미한 꿈처럼 느껴지지만,
그래도 이제 엄마가 좋은 걸 해주려고 해.




어느 날 엄마와 외출을 한 오빠가 유한킴벌리에서 산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들고 돌아왔을 때,
나는 폭염 속 시장의 혼미함보다 더 아득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거기가 값이 싸서만은 아니래. 그 주인이 착하고 정직해서 꼭 거기서 사야 한대.”

오빠의 말대로라면, 싼 가격에 그렇게 착할 수 없는 논리까지 더해졌으니,
나는 정직한 주인에게 휴지를 사러 대신상사 유한킴벌리 신천대리점에 가야 하는 거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예전에 살던 동네의 착한 장미 미장원에 가야 하는 거고,
집 앞의 은행을 두고 사거리를 두 번 지나 친절한 여직원이 기다리는 마을금고에 가야 하는 거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는, 엄마의 유한킴벌리가 거룩하게 나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어서,
우리는 지금 젖은 수건과 런닝을 뒤집어쓴 채 이 거센 빗줄기 속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게 느려진 엄마는, 택시를 타지 않은 게 미안한지 빠르게 걷다가 미끄러질 뻔하고,
나는 엄마가 아직도 나의 엄마라서 필요한 순간이면 이렇게 힘을 내는구나 생각한다.
이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우리는 매일 맨발로 집 앞 공원을 걸었고,
나는 평생의 걸음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걸은 탓에 난데없이 건강해져서
11Km 상인동 장미 미장원을, 5.7Km 대신상사 유한킴벌리 신천대리점을,
착한간장공장공장장에게 간장을 사기 위해 9.2Km를 달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의 지도에는 어느새 엄마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그 지도 속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엄마의 세상을 엿보게 되었다.
때로는 주소도 모른 채 찾아가는 곳, 길가의 나무와 꽃을 지도 삼는 곳.
봉지 없는 과자를 파는 곳,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는 곳.

별것도 아닌 이 일들을 위해 엄마는 이 무거운 가방을 끌고 이 많은 길을 걸었을까?
이 길에 앉아 새끼 친 선인장을 팔며 혼자 국수를 먹었을까?
이 넓은 들에서 흙먼지를 마시며 이삭을 줍느라 마른기침을 한 걸까?

 



한결같이 엄마에 대해 같은 말을 하며, 한결같이 엄마를 마음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영화 <빅 픽쉬>에서 허풍쟁이 아버지와 반목하던 아들 윌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산타클로스 같아요. 매력적이지만 거짓이죠.“

당신의 삶을 힘들게 몰아간 그 순수함이 마음 아파 내가 꽥꽥 내지르던 소리 너머에는,
눈부신 들판에 파랗게 쑥이 자라나고, 엄마의 정직하고 착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엄마는 그 착한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사랑받고 있었다.

 




엄마가 기억을 잃어가던 그날 바닷가에서, 무언가 멍해진 엄마의 눈에 문득 눈물이 흘러서,
오빠와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빙설을 먹으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때까지 우리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지만,
엄마의 반찬이 짜서 싫다던 오빠는 처음으로 반찬을 집으로 가져가
엄마가 해주는 마지막 반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씩 아껴 먹었다.
그리고 나는 몰래 버리려고 싸둔, 짝이 맞지 않는 엄마의 양말들을 서랍에 소중히 챙겨 넣었다.
그러자 우리들 마음속에 무언가 반짝이듯 힘이 생겨났다.




그리고 엄마의 마음속에도 무언가 오래된 쓸쓸함 같은 게 반짝이듯 힘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때 나와 언니와 오빠들이 함께 엄마를 꽉 붙들고 온몸으로 반짝거릴 때,
나는 엄마의 심장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어렴풋이 희미하게, 진줏빛처럼 희고 은은한 행복감 같은 것을.
믿을 수 없게도 난생처음으로.

그리고 엄마는 어느 이른 아침 긴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고,
기억을 되뇌며 반찬을 만들고, 거친 돌멩이를 비로 쓸며 맨발로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죽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너희들이 이렇게 슬퍼하니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계절은 바뀌어 지금은 늦은 여름이다.
매미가 울고 고양이가 나무 위로 날아오르고, 새삼스러운 것 없는 풍경이지만,
엄마와 걷는 이 여름이 마치 처음 보는 나라의 계절처럼 여겨진다.

장미가 피어나는 동안 엄마는 조금씩 기억을 되찾았고,
간혹 목욕탕 신발장에 옷을 넣을 때가 있지만,
구멍 난 런닝을 머리에 쓰고 나의 손을 이끄는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나의 엄마여서
그 강인한 숨 위에 나를 싣고 이 커다란 세상을 조용히 걸어가고 있다.




나는 언제나 그 삶에 눈물지으며 내가 사는 세상으로 엄마를 데려오고 싶어 했지만,
윌의 아버지처럼 나의 엄마도, 당신의 세상에 대해 내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건 내 인생의 이야기란다.“
그걸 알게 하려고 엄마는 기억을 잃어버리고, 당신의 세상으로 나를 데리고 온 건지 모른다.

 

 


자그맣게 쪼그라든 엄마의 젖은 머리를 닦으며
우리 삶에 이토록 귀중한 순간이 지금껏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우리들의 집, 별과 달의 밤 속으로 비가 내리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바뀌면, 내가 완전히 바뀌면, 정말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용기를 주고 외롭지 않게, 이제부터는 내가 엄마를.

 



Epilogue

어머니는 굽은 걸음으로 느릿느릿 공원을 걷는다.
“우리 엄마 착하네. 운동도 열심히 하고.”
나는 다가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로등에 불이 켜진다.

때로는 손을 잡고, 때로는 앞서가고,
공원을 한 바퀴 돌면 어머니의 굽은 등을 만나고,
죽는 게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쓸쓸했던 삶이어서
내 마음에 축축한 바람이 분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을 적에
새삼 그 모습이 이렇게 가슴 뭉클할 수 있는지,
그래서 가슴이 떨려 눈물겨울 적에
우리가 잠시 이곳에 와서 꿈같은 일을 벌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삶이 우리에게 가장 옳고 좋은 것을 주고자 이 모든 것을 준비한 것임을 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의 자유를 제한하던 나의 폭력을 참회하게 될 것이고,
내가 부정했던 많은 것들이 긍정으로 바뀔 것이고,
형제들이 모일 것이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애쓸 것이고,
그 체험은 우리 모두를 바꿔 놓을 것이다.

언젠가 먼먼 나라에서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우리는 너무나 행복하여 하하하 웃을 것이고,
이 삶이 참 좋았음을, 그 고통이, 사랑하여 생긴 우리의 눈물이 좋은 것이었음을
어깨를 보듬으며 이야기 나누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다른 이야기들을 하려고 해. 정말 이제는 나의 동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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