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페인팅레이디 동화달력<집의 기억>이 나왔습니다

김계희
2017-11-27
조회수 1020



집은, 바닥에 흩어진 소년의 머리카락을 좋아했습니다.
마루 틈에 숨어 있는 희고 깨끗한 손톱을 좋아했습니다.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 창유리에 입김을 부는
소년의 동그란 입술을 느낄 때면 집은 자신이 이해되었어요.
하지만 기다란 풀이 지붕을 덮고 노란 이끼가 벽을 덮기 시작했을 때
집은 소년이 떠난 것을 알았습니다.



집은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습니다. 들판이던 곳에 하나둘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가 숲을 이루는 동안에도 집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들판을 덮은 번개가 지붕을 태운 일도 있었어요.
때마침 내린 비가 집을 지켜 주었지만 희고 아름답던 집은 검게 변해버렸습니다.



검게 변한 집에도 가끔 새로운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손님들은 집에 머물며 숲 속 구석구석 덫을 놓고 돌아갔습니다.
깊은 밤, 덫에 걸린 고라니의 비명이 숲을 가득 메울 때면
집은 무서움에 가슴을 떨었습니다.
그런 날이면 집 안 구석구석 배어있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계단을 오르던 소년의 보드라운 발바닥,
담장 위로 울리던 냇물 같은 웃음소리,
그 풍요의 기억들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기억을 잊지 않고 간직한다면 언젠가는 다시
포근한 안식처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에요.



다정한 연인들이 몰래 숨어드는 밤이면 집은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하지만 연인들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명랑한 소년들이 무리 지어 찾아오는 날에도 집은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하지만 소년들은 창문을 깨거나 의자를 부수는 놀이를 더 좋아했습니다.

손님들이 다녀갈 때마다 집은 흉하게 변해 갔습니다.
결국, 집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길 바라게 되었어요.
마음속 진실한 그 바람이 오히려 고통을 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많은 시간이 흐르고, 집은 잡초와 덩굴에 파묻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집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띄게 허물어져 갔어요.
푸른 덩굴이 묘지처럼 뒤덮인 집을 사람들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집은 아무렇지 않았어요. 어차피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기억은 사라지고 없으니까요.



저무는 잎들이 두껍게 쌓이던 어느 가을밤
집은 문득,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처음엔 꿈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고요히 들려오는 낮은 숨소리에
집은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곧 외롭고도 슬픈 감정이 파고들었어요.
오래전 그 기억들이 이젠 너무도 먼 세계의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달빛 속에 고요히 잠든 남자를 바라보며 집은 가슴이 아팠습니다.



집은 잃어버린 먼 기억이 마음속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기를 빌며
층계를 쓸며 오르는 손바닥의 감촉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습니다.
햇살 비추는 창 아래 따스한 식탁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습니다.
해와 별이 뜨고, 다시 해와 별이 지는 낮과 밤이 이어지는 동안
검은 연기의 기억 위로 장밋빛 울타리의 기억이 덮이기를,
고라니의 슬픈 비명 위로 소년의 웃음소리가 덮이기를 애썼습니다.
그래서 오랜 여행에 지친 그가 행복한 꿈을 꾸고 일어나
새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고 바랐습니다.



투명한 태양이 아름답게 비치던 어느 아침
남자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 가만히 집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창밖의 풍경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문을 열고 집을 나갔습니다.

집은 가슴에 힘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가슴이 후두둑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숱한 시간 고독 속에서도 집은 울지 않았습니다.
축축한 곰팡이가 벽을 허물고 화염이 지붕을 덮을 때도,
그리고 마침내 빈집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던 그 순간에도
집은 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집은 흐느끼며 울었습니다.
소년이 떠나가던 날, 오래도록 울던 그 밤처럼 온몸을 흐느끼며 울었습니다.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집은 이제 아무도 머무르고 싶어 하지 않는, 꿈꾸기를 단념한 채 흉한 덩굴에 휩싸인
아무런 의미 없는 곳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집은 마침내 마지막이 다가왔고, 몸속으로 파고든 덩굴의 깊은 뿌리가
자신을 곧 허물어뜨릴 것을 알았습니다.
그 풍요의 기억들을 여전히 간직하고자 애를 썼더라면
남자가 이렇게 떠나버리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깊은 후회가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석양 속을 걸어오고 있는 남자를 보았습니다.
노란 햇살에 머리칼을 반짝이며 걸어오는 남자의 손에는
오래전 손님들이 놓고 간 덫이 들려 있었습니다.



집에 다다른 남자는 덩굴을 걷어내고
가방 속 물건들을 선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집을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렇게 낡은 집에서 이토록 따뜻한 꿈을 꾸게 되다니...
아직까지 이런 온기를 느낄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집이야.“
남자는 그게 무엇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창 아래 동그랗게 몸을 모으고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집이 간직한 기억 속 아름답고 진실한 꿈을 꾸며
남자는 이제, 여행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룻바닥에 스미는 따뜻한 살 내음을 느끼며
집은 이제, 기다림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epilogue

아직도 눈 감으면 대추나무 잎사귀에 반짝이던 충만의 햇살을 볼 수 있습니다.
온통 생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찬 맑은 아이를 볼 수 있습니다.
맨드라미 꽃씨들이 손안에서 출렁이고
모든 것들이 서로를 사랑하여 몸을 기울이는 느낌,
오늘처럼 햇살이 반짝였고, 마당은 고요하고 그윽하였습니다.

영원 속에 정착된 우리 귀중한 행복의 기억은
언젠가 자신을 그 자리에 다시 세울 수 있게 하는 힘이 됩니다.
그 기억의 빛은 끊임없이 우리 삶 속에 고요하고도 풍부한 무언가를 퍼뜨려
우리가 처음 웃었던 해맑은 웃음을 되찾기 위한 도정에 오르게 합니다.
인생이라는 서투른 꿈속에서 헤매고 쓰러졌다가도
마침내 진실로 살기 위해 우리가 다다르게 될 곳, 그곳은 사랑일 것입니다.

동화달력이 올해로 16회가 되었습니다.
항상 사랑 어린 시선으로 이야기를 읽어 주시는 분들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는 제 속의 아이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저를 떠나지 않고 지켜주어 감사합니다.
집의 기억, 모든 것이 그대로인 행복의 시절.
햇살이 반짝였고, 꿈속에는 소녀들이 춤을 추었습니다.


페인팅레이디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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