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동화달력<화가들>이 나왔습니다.

김계희
2018-11-25
조회수 2488

                                                                            André Gagnon_love thema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겨울밤, 트럼펫 소리 퍼지는 우리의 교정은 따뜻하고 우아하여서 우리는 모두 화가를 꿈꾸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알았던 우리는 연탄 두 장이 타고 있는 작업실에서 언 손을 비비면서도
의심의 여지없이 화가의 꿈을 향해 달려갔다.



나뭇잎들이 다소곳이 내려앉는 저녁, 고요히 누운 교수님의 목소리는 슬펐다.
“내가 쓸모없는 것을 가르쳐서 미안하구나...”
그분이 떠나시던 날 우리는 많이 울었다.
졸업 후에도 겨우 동물원 앞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매일 두 장씩 모사한 그림을 중국으로 보내는 일이,
그런 쓸모없는 일을 하는 우리가 죄송하여서 많이 울었다.



1999년 2월의 밤은 너무나 추워서,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그림이 고독하여서,
어쩔 수 없는 생각에 나는 빠져들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우리의 꿈이 실패했다는 것을.






화가가 되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화가가 되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작은 아이가 그림을 그리러 오던 날, 나는 그 아이가 훗날 화가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랬듯, 우리가 그랬듯, 아이는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몇 번의 생을 거쳐 그림을 그려온 듯 너무도 익숙하게, 묵묵히, 그리고 뜨겁게,
쉼 없이 오래된 기억을 풀어내는 모습을 나는 지켜보았다.
돌아갈 때면 언제나 목마른 듯이 “매일 매일 선생님과 그림만 그리며 살고 싶어요.”
그럴 때 아이의 눈은 언제나 무언가를 말하고 있어서,
나는 그 눈 속에 든 먼 생의 과거와 어린 날의 나를 만나곤 했다.



“선생님, 이곳은 온통 다 하얘서,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하얀 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영감이 떠올라요.
저도 이런 곳에서 선생님처럼 그림을 그리며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싶어요.
선생님이 늙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푼젤의 늙지 않는 마법의 금빛 꽃이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모두 앎을 가지고 세상에 온다.
어떤 이는 정확히 그것을 기억해 내고 바로 자신의 앎으로 들어가고,
어떤 이는 최선을 다하지만 어렴풋이 그 일부를 기억해내고,
어떤 이는 그 기억을 외면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앎을 가지고 세상에 온 우리는 그 앎대로 생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아름다움, 가슴 뜀, 행복과 전율의 마음이다.
우리는 그것을 실컷 누려야 하고 최선을 다해 찾아야 한다.



“선생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몇 번이나 여기를 왔었어요.
그리고 문밖에 서서 선생님이 창문에 붙이고 간 글씨를 읽고 또 읽곤 했어요.
이게 선생님의 글씨구나 하며 선생님을 생각했어요.
여행에서 돌아오셨으니 이제는 계실까 해서 그저께도 왔었어요.
오늘 다시 수업을 시작하니 일찍 오셨을까 해서 두시에도 왔다가 돌아갔어요.”



이 아이가 나를 어느 곳으로 데려가려는 것일까...
이 작은 아이가 그 깊은 사랑으로 나를 고뇌에 젖게 해,
이 아이의 열망에 나 자신도 이해 못 할 눈물이 흐를 때가 있다.
언젠가는 아이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
고독에 대해, 아름다움에 대해, 그리고 우리를 거쳐 갈 열망과 그리움에 대해.




"네가 그림을 알고 태어난 거란다.
꽃이 아름다움을 저절로 알고 피어나듯, 나비가 꽃에게 가는 길을 저절로 알고 날아가듯,
우리는 아름다움을 알고 태어나, 너는 그림으로 그것을 찾아가려는 거란다.
때로는 눈물도, 그치고 나면 빛나는 것이 되어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간단다.
지금은 무슨 말인지 모를 테니 기억해 두렴.
언젠가 네가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오면 이 말이 기억날 거야...“



Epilogue

선생님은 너희에게 언제나 이 말을 전하려고 해.
우리 삶의 나침반은 사랑과 자유만을 향하고 있음을 전하려고 해.
매번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진정한 창조란, 찬성할 수 없는 시스템이라면 벗어날 수 있도록
네 삶을 스스로 디자인하고 너만의 확고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고,
사랑과 자유는 거기서 시작되는 거라고 전하려고 해.
선생님은 언제나 그 말을 하고 있단다.

<하늘을 걷는 남자>의 아름다운 그 장면을 기억하길 바래.
너희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말이란다.
“나는 줄타기를 잘해서 돈을 버는 서커스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내 꿈은 역사상 최고의 고공 줄타기를 하는 거예요.
난 아티스트가 되려고 해요.“

페인팅레이디 동화달력이 20주년이 되었습니다.
잠든 사이 꿈속에 아주 오랜 과거의 것이 찾아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자랐는데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그래도 따뜻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동화달력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인팅레이디 드림


*6월과 9월은 드가와 헤세의 그림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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