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동화달력 <슬루니의 고사리>가 나왔습니다.

김계희
20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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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형_여름의 조각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어머니의 책상 위에는 늘 새로 그린 어머니의 그림이 놓여있다.
어머니의 책상은 육십 센치 밖에 안되는 옻칠이 벗겨진 작은 밥상이고,
그 위에는 물컵 크기의 작은 물통과 몇 개의 붓이 놓여있다.
삼 미터가 넘는 나의 책상과 백 개가 넘는 붓이 든 나의 붓 통과는 비교되지 않게,
어머니의 책상은 작고 소박하다.
어머니는 그 책상에서 십 년이 넘게 붓글씨를 연습하셨고,
한번 시작하면 먹물이 아까워 벼루의 먹이 닳을 때까지 글씨를 쓰셨다.




어머니는 오늘도 새로운 그림을 상 위에 올려놓고 바퀴 달린 가방 속에 화분을 넣고 집을 나가셨다.
그 선인장들을 시장에서 천 원씩에 팔고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음에도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바퀴 달린 가방을 측백나무 아래 몰래 숨겨 놓을 것이다.
그리고 차곡차곡 모은 삼만오천 원을 서랍에서 꺼내 세었다가 다시 서랍 속에 반듯하게 펼쳐 놓을 것이다.




마당에 남아 있는 백 개가 넘는 화분들은 12월이 오기 전 방안으로 옮겨져
꽃샘추위가 지나는 이듬해 3월까지 나와 함께 불편한 동면을 하게 될 것이다.
수렵시대에나 있을 법한 마른 가지가 뒤엉킨 커다란 나무와 이름 모를 풀들은
나의 혼미한 겨울잠 속에서 팔랑팔랑 흰나비를 불러 모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제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이삼 년 사이 그렇게 되어 버렸고, 나는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는 게 두 배가 줄었다.
나는 어머니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잊은 채 무언가를 말하다가,
다시 크게 두어 번 반복하다가, 버럭 화를 내곤 한다.
그런 날이면 잠든 어머니에게 건너가 조용히 눕고,
깜짝 놀라 깨어난 어머니는 무서운 꿈 이야기를 흐릿하게 중얼거리다가 다시 잠 속으로 빠진다.

 



말을 잃고 조금씩 침울해져 가는 어머니에게 그림을 시작하도록 했지만,
색을 섞는 법도 알지 못하는 여든여섯의 어머니가 그림에 흥미를 느낄 리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섞어 놓은 색이 아까워 팔레트의 물감이 닳을 때까지 이곳저곳에 같은 색을 칠하는 게 다였다.
수백 개의 말도 안 되는 초록 점들을 찍어 놓고 그래도 오리가 제일 잘 그려졌다고 말을 하거나,
사진을 거꾸로 놓은 채 거꾸로 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가 거꾸로 된 사진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이해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초록 점들 사이 어느 곳에 그 오리가 틀어박혀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그렇게 그린 그림이, 이해하기 힘든 구성과 거칠고 비뚠 선의 불균형이
그림 속에서 예상치 못한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생명력 있게 솟아오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머니의 그림은 어디선가 주워 온 플라스틱 화분이 어지러이 널린 마당과 하나 다를 바가 없어서,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화분들은 그림 안에서도 무섭게 새끼를 치고 있고,
손질된 정원수 사이에는 난데없이 피어난 해바라기가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다.
도무지 수집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페트병 더미와 이 빠진 찻잔들의 아방가르드한 행렬도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림에는 스플리트의 무너진 담장에 피어난 흰 꽃도 있다.
어머니와 처음 떠난 여행에서 길을 잃었을 때, 내가 구글 지도를 뒤적이며 헤매는 동안
꽃과 나무의 모양을 보고 왔던 길을 찾아냈던 어머니의 지도가 있다.
그리고 슬루니 마을에서 고사리를 뜯고 오던 길에 만난 만개한 분홍나무가 있다.
내가 몇 년이 걸려도 완성하지 못한 그 날의 풍경 속에는
어머니가 단숨에 완성한 노을 위에 퍼지던 종소리가 있다.




어머니는 자신이 그린 곳이 스플리트인 것도 알지 못하고, 슬루니의 들판인 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어머니는 가본 중에 제일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좋았는지 물으면 ‘모든 게 다‘ 라고 말한다.
나는 그 ‘모든 것’ 속에 무엇이 들어 있고, 무엇이 종소리를 그려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어머니의 그림은 세탁기 뒤에 사는 무엇과 고요히 살아가는 다도코로 씨처럼
내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에서 숨을 쉬는 것만은 분명했다.
다로코로 씨가, 세탁기 뒤에서 새는 물을 마시며 살고 있는 것이 보라색 빛을 내는 수정이라고 말하더라도
귀가 들리지 않는 어머니는 그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머니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들을 한다.
나를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라도 나의 어머니를 만나고 나면 나에게 친절해지는 이유에 대해,
밤을 새우고 또 새우며 그리던, 하지만 아무도 감동하지 않는 나의 그림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어머니의 그림 앞에서 환해지던 기쁨에 찬 얼굴에 대해 생각한다.
아마도 그건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잡초가 무성한 먼지 쌓인 집을 찾아가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대문을 넘어 할머니의 정원에 발을 디딘 그녀는 말한다.
"아아, 고요하다. 발을 들여놓고 보니, 모든 것이 아주 평화롭다.
아빠가 왜 여기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어머니가 그린 만개한 분홍나무가 있던 곳은 슬루니 마을이다.
크로아티아 중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고사리가 가득 핀 들판을 만났을 때,
어머니는 노을이 잿빛으로 두꺼워질 때까지 고사리를 뜯었다.
배낭보다 커다란 그 고사리 더미를 매고 우리는 스플리트와 두보르니크로 이동했다.
아드리아 해안을 달리는 여섯 시간 내내 어머니는 고사리를 어떻게 비행기에 실을지를 고민했다.
숙소에 도착해서는 고사리를 말릴 곳부터 찾았고,
매일 아침 숙소 뒤 작은 공터에서 고사리를 볕에 내어 말리고 또 거두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우리가 먹던 고사리와는 다른 맛을 내는 그 고사리는 다 버렸다.




결국엔 쓸모없게 될 그 고사리를 말리느라 우리는 자다르의 해변에도 가지 못했고,
누가 고사리를 가져갈까 봐 지하 궁전도 구경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고사리를 뜯던 슬루니의 노을 진 들판은 가슴 속에 남았다.
어머니의 동그란 어깨가 들판 속에서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고, 그 어깨 위로 내려앉던 종소리는 남았다.

아무튼 그것은 훗날에, 남았다.




Epilogue

어머니와 떠난 여행지에서 길을 잃었을 때입니다.
지도를 펼쳐 들고 한 시간째 헤매던 저에게 어머니는 몇 번이나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지도를 보느라 정신이 없던 저는 어머니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한참 후 골목길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 길이다. 이 나무, 흰 꽃, 담 위에 저 꽃이 맞다.“
그리고 저는 어머니 지도를 따라 십 분 만에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제가 구글 지도를 뒤적이며 헤매는 동안, 어머니는 오던 길에 보았던 꽃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무시한 게 미안했습니다.

어머니에게 그림을 시작하게 한 것은 청력이 약해진 어머니의 우울함을 달래려는 이유였지만,
제가 수십 년이 걸려도 닿지 못한 그림을, 비뚤고 서툰 선으로 단숨에 그려나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저는 저의 지도와는 달랐던 어머니의 지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버린 꽃을 하루라도 더 살게 하려고 주워 와 화병에 꽂고,
부러진 선인장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옮겨 뿌리를 내리게 하고,
이역만리 이국땅에서 뜯은 고사리를 말려서 팔 생각으로 희망에 부풀던 어머니의 그 ‘순수함’이
이처럼 강하고 순결한 삶과 예술을 만들어 낸 것이라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올해 달력의 그림은, 힘든 시절에 태어나 오직 어머니의 역할로만 살아야 했던 저의 어머니가
여든여섯의 나이에 처음으로 그림을 시작하여 6개월 남짓 동안 그린 것들입니다.
어머니의 순수했던 삶이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건’ 이기에
저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한줄 한줄 달력의 글을 읽어드리는 밤, 어머니는 다도코로씨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엄마 같은 사람이야. 사람들은 다도코로씨에게 화풀이를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해.
그래도 다도코로씨가 안 보이는 날은 모두가 시무룩해져.
세탁기 뒤에 숨어 있는 돌 같은 거랑 살고 있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그게 외롭지 않을까 걱정을 해.
꼭 필요한 사람, 없어지면 외로울 거야.“

동화달력이 스물세 해를 맞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화달력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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