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페인팅레이디 동화달력 <어머니의 시간을 빌린다>가 나왔습니다.

김계희
2022-12-05
조회수 675

                                                                           정재형-사랑하는 이들에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드가의 복제화를 끼고 제일 서적 육교를 건너던 날 오후, 나는 도시바 소형 녹음기를 잃어버렸다.
아무 말이나 아무 말이나 집어넣던 녹음기 속의 이야기는 끝을 맺지 못했고,
그날 이후 나는 아무 말이나 아무 말이나, 의미 없는 또 아무 말을
버려진 나무 의자에 대고, 부스러진 축축한 나뭇잎에 대고 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면 잠들어 계신 어머니는 아침이면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매일 어디를 가시느냐고 묻지 않았다.
머리맡에 놓인 초라한 돈을 주머니에 꽂고 집을 나오면 세상은 다르게 펼쳐져 있어서,
동아 쇼핑 광장 위로 비둘기가 날고, 줄줄 아이스크림이 바람에 녹고,
물 빠진 랭글러와 금색 머리칼은 멋지게 어울려서, 내 이십 대의 어머니는 그냥 어머니로만 살면 되었다.

 



기차가 덜컹거리는 소리, 목적지를 알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의 말,
낯설고, 아무도 없고, 어질어질 이국의 향기에 취해 있던 내 삼십 대의 어머니는 그냥 어머니로만 살면 되었다.
나는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러던 어느 해 봄, 나의 부주의로 작업실에 화재가 나던 밤,
집으로 돌아와 잠든 어머니를 바라보며 나는, 이제 다르게 살겠다고 생각했다.

 



밤을 새우고, 그림을 그리고, 달력을 만들고, 어머니에게 화단이 있는 집을 사드리고, 그 화단에 다시 맨드라미가 피어나고,
그래서 나는 괜찮았다. 삼 일을 자지 않고 일해도 괜찮았고, 다음날 여전히 깨어 있어도 괜찮았다.
밤을 새워 일하느라 어머니의 전축이 고장 난 것을 몰랐어도,
인쇄소를 뛰어다니느라 어머니의 귀가 약해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어도 어머니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열심히 돈을 벌면 되는 줄 알았다.
매일 어머니를 데려가던 아침과 지친 채 잠든 어머니의 저녁 때문에, 돈을 벌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홀로 수술실로 들어가는 어머니에게 현금카드를 건네고
허겁지겁 인쇄소로 뛰어가던 내 사십 대의 어느 날,
터질 듯 커지던 어머니의 TV 소리가 조용해지던 날,
내가 모르던 사이 어머니의 방에서는 조금씩 무언가가 끝나고 있었다.
전축 소리가 끝나고, TV 소리가 끝나고, 어머니를 찾는 전화벨 소리가 끝나고,
그렇게 끝나버린 것들에는 조용히 먼지가 쌓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어머니의 전축을 고쳐놓지 못한 게 후회되었다.
‘이제 엄마는 음악을 들을 수가 없는 거네. '
그러자 시간이 솨아- 소리를 내며 나에게서 빠져나갔다.




어머니는 십 년 전 내가 만들어드린 CD 세트를 아직 버리지 않고 서랍 속에 두고 계신다.
그중 절반이 소리가 나오지 않는데도, 전축을 고치면 음악을 다시 듣게 될 거로 생각하셨을 것이다.
서랍 속에는 어머니가 일흔이 넘어 시험을 본 초등학교 검정고시 합격증이 있고,
중학교 시험을 위해 공부하신 노트와 책들이 있고, 매일 밤 펼쳐서 공부하시는 한자책과 일본어책이 있다.
가난하여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어머니는 나 몰래 검정고시 시험을 보셨고,
지금도 못다 한 공부를 하시느라 늘 앉은 채로 잠이 드신다.




두 해 전 어머니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찬란하게 쏟아지는 어머니의 그림을 바라보며
이토록 큰 재능을 알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그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자신의 열망을 채울 곳을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흩어져야 했을 그 열정들은 분명 삶에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지난해 어머니는 마늘 이삭을 주우러 들판으로 가는 대신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오랫동안 잠을 잤고,
가을이 그렇게 노란지 이십 년 만에 다시 알게 되었다.
노란 가을 속을 걷는 어머니의 느려진 걸음을 바라보며
나는 어머니가 하시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다.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고,
당신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나에게 어머니의 남은 시간을 빌려주려 한다는 것을.




언제부턴가 달력을 만드는 일이 힘겨워졌을 때,
나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고,
그때 어머니가 몸을 일으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어머니는 알았을지 모르겠다.
내가 잃어버린 녹음기 속의 아름다운 말들과
나의 꿈속에 더는 들리지 않는 소녀들의 웃음소리를.




당신의 가난함을 늘 미안함으로 간직하고 살아오신 어머니가
그 삶의 마지막에 조그마한 몸을 일으켜 당신의 남은 시간을 빌려준 이유,
그것은 나를 잠을 재우기 위함이었고. 천천히 밥을 먹이기 위함이었고,
노란 가을을 보게 하기 위함이었고, 다시 나의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함이었고,
내가 어머니에게 못한 후회의 시간을 되돌릴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지난 오월, 어머니는 일 년 동안 그린 그림을 모아 전시회를 여셨다.
내가 만든 원피스를 입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어머니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모두가 어머니에게 친절했고, 어머니의 그림을 좋아했고,
그러는 동안 잠시 귀가 밝아진 어머니는 사람들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마른 흙 위에 휘갈긴 낙서인 듯 글씨인 듯,
금세 흙먼지로 사라졌을 어머니의 오래된 이름에 박수를 쳐주어서 고마웠다.




나는 오랫동안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머니는 어머니의 손으로 이루고 싶었던 꿈이 있었을 것이다.
복숭아뼈 아래 걸린 고무줄이 늘어난 양말에는
언제나 그 꿈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을 것이다.
그 고되었던 삶이 이토록 짙고 빛나는 회화가 되기까지 가슴 안에서는 수많은 새가 아프게 날아올랐을 것이다.



Epilogue

추운 겨울 새파랗게 언 차가운 손이 있어서, 나는 길거리에 좌판을 편 노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겨울 새벽 신발도 없이 눈길을 걸어간 뒷모습이 있어서, 나는 슬픔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한다.
내 맘 어쩌지를 못해 요동치는 내 팔을 부둥켜 잡으며 저절로 푹 무릎이 꺾어지며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
아득하고 캄캄하게 모든 것이 끝인듯한 그 눈동자가 엄마의 삶이었다는 걸 알아서
나는 절망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한다.

하굣길, 달이 아니었으면 칠흑일 방죽 길을 걸으면,
엄마인 줄 알아차리라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혹여 위험한 사람이 내게 오고 있다면 저편에서 사람이 오고 있다는 걸 알리려고,
흔들흔들 손전등을 흔들며 나를 향해 걸어오는 불빛이 있었다.

방죽 길 중간에서 만난 우리가 나머지 반을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마음 어찌할 수 없어 서럽고도 애틋한 그 길을 말없이 걸으며,
가끔 엄마가 아무렇지도 않게 노래를 부르면 내가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 부르고,
소쩍새 울음만 가득한 그 세상엔 엄마와 나 둘뿐이었다.
아무도 모르고, 알 수 없고, 그냥 우리만이 서로를 조용히 아는 거였다.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 - 알아야 했던 것, 알 수도 없었던 것,
그리고 알지 않아도 되었던 것을 알게 된 건, 엄마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바닥에 닿으면 무언가 치유 같은 것, 석류꽃같이 빨갛게 눈물겨운 것,
어렴풋이 그런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허공에서 내 몸을 붙잡아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도 엄마 때문이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길 언제나 바란다.
우리가 망각의 강을 건너 그 모든 기억을 잃게 되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단 하나의 기억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용기를 주고, 외롭지 않게,
다음번엔 내가 엄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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