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는 하얗게 널린 이불 홑청 속을 촥촥 펼치며 지나가는 놀이를 좋아했다. 빨래 사이를 지날 때 풍기는 마른 비누향과 볕에 바싹 말라붙은 천이 촥촥 소리를 내며 펄럭이는 시원한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훌쩍 키가 커버렸을 때, 햇볕 가장 따스한 날을 기다려 해묵은 홑청을 뜯어 거품을 내고, 마당엔 기일게 빨랫줄을 걸고 지난날의 엄마처럼 빨래를 한다.
봄볕에 빳빳하게 마른 빨래가 뽀얀 냄새를 풍길 때 설레는 마음으로 그 아련한 첫 가장자리를 펼치면...
아아 ― 펄럭이는 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유년의 햇살
누가 흙을 많이 먹나 내기하던 은환이를 만나고, 처음 잡은 손 떨리던 짝사랑 순이를 만나고, 구슬치기 신나던 개나리나무 그늘과 흙담 냄새 일렁이던 뒤안의 깨진 기왓장을 만난다.
흙장난에 더러워진 손자국이 이곳저곳 붉게 찍힐 때 아쉬운 마음으로 마지막 귀퉁이를 펼치면...
아아― 언제나처럼 웃고 계시는 아름다운 나의 어 머 니...
추운 겨울 새파랗게 언 추운 손이 있었어서 나는 길거리 좌판을 편 노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겨울 새벽 신발도 없이 눈길을 걸어간 뒷모습이 있었어서 나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다.
내 맘 어쩌지를 못해 요동치는 내 팔을 부둥켜 잡으며 저절로 푹 무릎이 꺾어지며 나를 바라보던 그 눈동자. 아득하고 캄캄하게 모든 것이 끝인듯한 그 눈동자가 바로 엄마의 삶이었다는 걸 알았어서 나는 절망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다.
하굣길, 달이 아니었으면 칠흑일 방죽 길을 걸으면 엄마인 줄 알아차리라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혹여라도 위험한 사람이 내게 오고 있다면 저편에서 사람이 오고 있다고 알리려고 흔들 흔들 나를 향해 걸어오는 불빛이 있었다.
방죽길 중간에서 만난 우리가 나머지 반을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마음 어찌할 수 없어 서럽고도 애틋한 방죽 길을 말없이 걸으며, 나는 설움이라는 게 차라리 꿈길처럼 아늑하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 엄마가 아무렇지도 않게 노래를 하면 내가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하고, 소쩍새 울음만 가득한 그 세상엔엄마와 나 둘 뿐이다. 아무도 모르고, 알 수 없고, 그냥 우리만이 서로를 조용히 아는 거였다.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알아야 하는 것, 알 수도 없었던 것, 그리고 알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알게 되었던 건 엄마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바닥에 닿으면 무언가 치유 같은 것 석류꽃같이 빨갛게 눈물겨운 것 어렴풋이 그런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허공에서 내 몸을 붙잡아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도 엄마 때문이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기 언제나 바란다. 우리가 망각의 강을 건너 그 모든 기억을 잃게 되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단 하나의 기억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용기를 주고, 외롭지 않게, 다음번엔 내가 엄마를.
정수년-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
▷ 그림동화는 2000~2002년도 작업으로 <연애하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2004년 휴먼앤북스를 통해 출판되었습니다. 홈페이지의 그림과 게시물은 상업적 용도 외에 출처를 밝히시고 퍼가셔도 됩니다.
페인팅레이디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ㅣ빨래
어린 시절 우리는 하얗게 널린 이불 홑청 속을
촥촥 펼치며 지나가는 놀이를 좋아했다.
빨래 사이를 지날 때 풍기는 마른 비누향과 볕에 바싹 말라붙은 천이
촥촥 소리를 내며 펄럭이는 시원한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훌쩍 키가 커버렸을 때,
햇볕 가장 따스한 날을 기다려 해묵은 홑청을 뜯어 거품을 내고,
마당엔 기일게 빨랫줄을 걸고 지난날의 엄마처럼 빨래를 한다.
봄볕에 빳빳하게 마른 빨래가 뽀얀 냄새를 풍길 때
설레는 마음으로 그 아련한 첫 가장자리를 펼치면...
아아 ― 펄럭이는 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유년의 햇살
누가 흙을 많이 먹나 내기하던 은환이를 만나고,
처음 잡은 손 떨리던 짝사랑 순이를 만나고,
구슬치기 신나던 개나리나무 그늘과
흙담 냄새 일렁이던 뒤안의 깨진 기왓장을 만난다.
흙장난에 더러워진 손자국이 이곳저곳 붉게 찍힐 때
아쉬운 마음으로 마지막 귀퉁이를 펼치면...
아아― 언제나처럼 웃고 계시는
아름다운 나의 어 머 니...
추운 겨울 새파랗게 언 추운 손이 있었어서
나는 길거리 좌판을 편 노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겨울 새벽 신발도 없이 눈길을 걸어간 뒷모습이 있었어서
나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다.
내 맘 어쩌지를 못해 요동치는 내 팔을 부둥켜 잡으며
저절로 푹 무릎이 꺾어지며 나를 바라보던 그 눈동자.
아득하고 캄캄하게 모든 것이 끝인듯한 그 눈동자가
바로 엄마의 삶이었다는 걸 알았어서
나는 절망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다.
하굣길, 달이 아니었으면 칠흑일 방죽 길을 걸으면
엄마인 줄 알아차리라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혹여라도 위험한 사람이 내게 오고 있다면
저편에서 사람이 오고 있다고 알리려고
흔들 흔들 나를 향해 걸어오는 불빛이 있었다.
방죽길 중간에서 만난 우리가
나머지 반을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마음 어찌할 수 없어 서럽고도 애틋한 방죽 길을 말없이 걸으며,
나는 설움이라는 게 차라리 꿈길처럼 아늑하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 엄마가 아무렇지도 않게 노래를 하면
내가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하고,
소쩍새 울음만 가득한 그 세상엔엄마와 나 둘 뿐이다.
아무도 모르고, 알 수 없고, 그냥 우리만이 서로를 조용히 아는 거였다.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알아야 하는 것, 알 수도 없었던 것,
그리고 알지 않아도 되는 것을 알게 되었던 건 엄마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바닥에 닿으면 무언가 치유 같은 것
석류꽃같이 빨갛게 눈물겨운 것
어렴풋이 그런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허공에서 내 몸을 붙잡아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도 엄마 때문이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기 언제나 바란다.
우리가 망각의 강을 건너 그 모든 기억을 잃게 되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단 하나의 기억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용기를 주고, 외롭지 않게,
다음번엔 내가 엄마를.
정수년-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
▷ 그림동화는 2000~2002년도 작업으로 <연애하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2004년 휴먼앤북스를 통해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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