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쓸모 - 이진희

김춘화
2025-05-07
조회수 25


강요하지 말아요


입맞춤은 좋아하지만

누군가와 나란히 팔짱 끼고 걷는 건 싫어요


잠깐은 마주 설 수 있지만

한 몸처럼 나란히 걸을 순 없는 건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가

오후 7시부터 새벽 3시 사이에

수두룩하게 나와 악수하고 가는

쓸모없는 나들 때문인지도 몰라요


가능하면

쓸모없어지고 싶어요

오후 7시부터 새벽 3시 사이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떠가는 들오리처럼

억지로 오리배에 태워도

페달을 밟지 않을 거예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라면

발 구르는 시늉을 할지는 몰라요

쓸모없어지려면 아직 멀어서

아직은 말뿐인 거라서……


하루 열여섯 시간을 자는 나무늘보처럼

그 나머지 시간에도 줄곧 졸고 있는 나부늘보처럼


나무를 베고 싶지 않아요 모래를 퍼내고 싶지 않아요 참호를 파고 싶지 않아요 총을 쏘고 싶지 않아요 유일한 신에게 기도하고 싶지도 우주여행을 하고 싶지도 않아요


수백 년 전 당신이 쓴 편지가 나의 심장을 찢어요 거기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어요 어떤 얼룩뿐 피일까요 술일까요 눈물일까요 당신은 편지를 보낸 적 없는지 몰라요 편지를 쓴 당신은 없었는지 몰라요


살아 있는 동안은 물론 죽은 뒤에도

영 쓸모없어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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