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 오은

김춘화
202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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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에는 손바닥에 그려진 실금들 중 하나를 골라 무작정 따라가고 싶었다. 동요하고 싶었다. 가장 가벼운 낱말들만으로 가장 무거운 시를 쓰고 싶었다. 그 반대도 상관없었다. 낱말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을 갖고 싶었다. 어떤 날에는 알록달록한 낱말들로 무채색의 시를 쓰는 꿈을 꿨다. 그림자처럼 평면 위에서 입체적으로 움직이고 싶었다. 한동안 내가 몰두한 건 이런 것들이었다. 입 벌리는 일을 조금 줄이고, 귀 기울이는 일을 조금 늘렸다. 귀를 벌리면 나비떼, 입을 기울이면 나이테. 터지고 있었다. 아무것이, 아무것도, 아무것이나.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진, 동요하는 어떤 낱말이. 그러고도 한번 더 동요하는 어떤 마음이.


돌아오는 길에는,

으레 영혼을 삶는 장면을 상상한다. 어쩔 수 없이 아름답다.


2013년 봄의 어떤 날

 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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