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을 정리하며 - 박일환

김춘화
202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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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수첩에 적힌 이름들을

새 수첩에 옮겨 적는 일로

한 해를 시작한다 늘 그랬듯이

몇몇 이름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작은 구멍들이 생기고


구멍을 빠져나온 이름들이

천천히 망각의 강을 건너는 동안

새로 나타난 이름들이

빈 구멍들을 메워 가리라


내가 수첩을 정리하는 동안

누군가의 수첩에도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을 빠져나온 내 이름이

새로운 구멍을 찾아다니리니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던 순간부터 시작된

이 무미건조한 작업이 끝나는 날

내가 돌아갈 구멍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그 날의 쓸쓸함을 위해, 새해여

나는 너에게 무엇을 바쳐야 하겠니

그 동안 버린 낡은 수첩들만큼이나 두꺼워진

내 얼굴을 갈고 닦는 일 말고

열심히 갈고 닦아 투명해지는 일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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