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일 - 박목월

김춘화
2022-11-20
조회수 11


내가 만일 너라면

따분하게시리

책만 읽고 있을 줄 알아.


도마뱀을 따라 꽃밭으로 가 보고,

잠자리처럼

연못에서 까불대고,

물 위에 뱅글뱅글

글씨를 쓰고,

그렇지, 진짜 시(詩)를 쓰지.


아침 나절에는

이슬처럼 눈을 뜨고,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매미가 되어 숲으로 가지.


내가 만일 너라면

따분하게시리

책상 앞에 붙었을 줄 알아.


책에 씌인 것은

벽돌 같은 것.

차돌 같은 것.

그렇지, 살아서 반짝반짝 눈이 빛나는

그런 것이라곤 한 가지도 없지.


내가 만일 너라면

조잘대는 냇물과 얘기를 하고,

풀잎배를 타고,

항구로 나가고,

무지개가 뿌리 박은

골짜기로 찾아가 보련만.


이제 나는

도리가 없다.

너무 자라버린 사람이기에.

어른은 어른은


참 따분하다.

그렇지, 내가 만일 어린 소년이라면

나는 따분하게시리

책만 읽고 있을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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