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을 먹으며 - 정호승

김춘화
202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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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 막차를 기다리며

동대구역 대합실 구석에 앉아 김밥을 먹는다

김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무지라고

단무지가 없으면 김밥은 내 인생에 필요하지 않다고

밤눈 내리는 동대구역 창밖을 바라본다

노숙자 사내가 말없이 다가와 손을 내민다

여기 앉으세요

자리를 내주고 김밥 한줄을 건네며

꾸역꾸역 물도 없이 김밥을 먹는

한때 농부였다는 그의 서러운 이야기를 듣는다

나도 한때 노숙의 시인이었다고

노숙자 아닌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말하려다가 거짓에 목이 메인다

누구는 보리수 아래에서 발우 하나와 누더기 한벌로

평생 부족함 없이 사신다는데

나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지닌 게 없다고

오늘 살고 있는 집보다 내일 살아야 할 집 때문에

더 춥고 배가 고프다고

처음 만난 노숙자끼리 말 없는 말을 나누며

우걱우걱 다정히 김밥을 나눠 먹는다

기다리는 기차는 아직 오지 않고

대합실 창가에 눈발만 흩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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