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거, 그깟 - 이호준

김춘화
202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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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년 살던 집 파는 서류에 도장 찍고 오는 길

아이들 다니던 학교 담장 밑에 산국 곱다

돌부리에 걸린 척, 내 집을 돌아본다

작년에 절집 불목하니도 그만뒀으니 집도 절도 없다,

 

생각하니 허전하다 그러다 이내 고개 젓는다

저 꽃은 들보 하나 얹은 적 없어도 환하게 웃지 않느냐

재산세 같은 건 잊고 살아도 되니 얼마나 좋으냐

사는 건 맹물로 허공에 그린 그림 같아서

한 뼘도 안 되는 길을 평생 헐떡이며 걸어왔다

열 켤레 넘는 구두굽이 바깥쪽만 닳아 없어진 뒤

남은 건 기울어진 어께

 

사는 거, 그깟…

 

주춤거리며 따라오던 아내가 밥이라도 먹고 가잔다

단골로 다니던 추어탕집으로 간다

아이를 키운 집 넘기고 정든 동네 떠나려니 서운하겠다

그대와 나, 한 시절 뜨겁게 생을 외쳤느니

밥보다 먼저 소주 한 병 주문한다

언제 우리 다시 이렇게 앉아 서로의 손에 젓가락 쥐여줄까,

제피가루 너무 많이 넣었다고 툴툴거려볼까,

생각하니 또 잠깐 먹먹하다

 

모처럼 마신 낮술이 걸음마다 매달린다

오늘이야 아내가 있으니 그럴 리 없겠지만

나도 모르게 101번 버스에 취한 몸 실을지 몰라서

현관문에 머리 댄 채 삐삐삐삐 비밀번호 누를지 몰라서

머릿속에 남아 있던 숫자 몇 개 얼른 지운다

 

사는 거, 그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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