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못난 것들아 - 박노해

김춘화
201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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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씩 서울을 다녀오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왜 이리 못 났는가, 못 났는가,

십 년째 제대로 된 책 하나 못 내고

침묵 속에 잊혀져가며 나이만 들어가는

무슨 인생이 이런가

무슨 운명이 이런가

 

해 저무는 마을 길을 홀로 걸어가는데

감나무 집 할머니가 반갑게 부르신다

굵고 성한 감은 자녀들에게 택배 부치고

비툴하고 못난 감을 깎아 곶감 줄에 매달면서

이거라도 가져가라고 한 바가지 내미신다

언덕받이 부녀회장님댁을 지나가는데

이번에 새끼 친 일곱 마리 강아지 중에

잘생긴 녀석들은 손주들에게 나누어 주고

절름거리는 녀석을 안고 있다가

가져가 길러보라고 선물하신다

 

내 한 손에는 잘고 비툴한 못난이 감들

품 안에는 절름발이 못난 강아지

어둑한 고갯길을 걸어가는 못난 시인

산굽이 길가엔 못난 쑥부쟁이꽃

 

못난이들의 동행 길이 한심하고 서러워서

울먹하니 발길을 멈추고 밭둑에 주저앉으니

물씬 풍겨오는 붉은 감의 향내

내 얼굴을 핥아대는 강아지의 젖내

바람에 흩날리는 쑥부쟁이꽃 향기

 

그래, 이 모든 것이 선물이다

비교할 수 없는 삶의 감사한 선물이다

 

나는 이 감들이 어떻게 자라왔는지를 안다

이 강아지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안다

이 쑥부쟁이가, 할머니가, 논과 밭이,

오솔길이 어떻게 지켜져 왔는지를 안다

잘나고 이쁜 거야 누구라도 좋아하지만

자신의 결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건 위대한 사람만이 할 수 있으니

 

이 어둔 밤길의 나의 못난 것들아

못난 시인의 못난 인연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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