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지 권정생 - 이정록

김춘화
2021-05-30
조회수 23


당신을 떠올리면

우물터 바가지가 생각납니다

목마를 때에는 시원한 물바가지

샘물 퍼올릴 때에는 두레박

마늘 생강 쪽파 다듬을 때에는 소쿠리

당신을 떠올리면 못난 바가지가 떠오릅니다

감자 놓을 때에는 마른 재 퍼오는 삼태기

땀 찬 어미소 여물 줄 때에는 쇠죽통

복실이한테는 개밥그릇, 병아리 씨암탉에게는 모이통

닭장 토끼집 돼지우리 고칠 때에는 연장통

전쟁놀이에는 철모, 밤 호두 땅콩 깔 때에는 탄피 주워모으던 반합 뚜껑

당신을 떠올리면 오래된 얼굴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꿀 한 번 담아보지 못한 꼬질꼬질한 바가지

시렁이며 벽장이며 높은 곳에는 올라가보지 못한 바닥의 나날

마루에서 토방으로 마당에서 헛간으로

끝내는 냄새 고약한 뒷간으로 가는 똥바가지

어깨 들썩이며, 논밭으로 소풍가는 오줌바가지

더 낮은 데는 없을까? 밀 보리 감자 고구마 무 배추

실뿌리 알뿌리에게 몸과 맘 다 들이미는 똥장군

당신을 보면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못난 얼굴이 떠오릅니다

당신을 읽을 때마다 저려오는 오금은

홀로 시렁에 걸터앉아 으스대고 있기 때문이죠

강아지 혀에 단물 퍼 올려주는 당신

병아리 부리로 목탁을 쪼는 당신

당신을 우러를 때마다 오그라드는 마음은

깨진 바가지에 남의 꿀 퍼 담으려 싸우고 있기 때문이죠

마당일 변소일 잘 마친 당신, 겨울잠 자는 오소리 굴까지

종소리 퍼 나르는 깊고 둥근 바가지

당신을 떠올리면 제비 새끼 똥 하얗게 핀

제비집이 떠오릅니다, 당신은

민들레꽃 바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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