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관한 생각 - 고재종

김춘화
202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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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쫓기는 자처럼 화급하여도 우리는

늘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일까. 새벽에 일어나

흰 이슬 쓰고 있는 푸성귀밭에 서면

저만큼 버려두었던 희망의 낯짝이 새삼

고개 쳐드는 모습에 목울대가 치민다. 애초에

그 푸르름, 그 싱싱함으로 들끓었던 시절의

하루 하루는 투전판처럼 등등했지, 그 등등함

만큼 쿵쿵거리는 발길은 더 뜨거웠으니

어느 순간 텅 비어버린 좌중에 놀라,

이미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타협해버린

연인들처럼, 그렇게, 한번 그르쳐 든 길에서

남의 밭마저 망쳐온 것 같은 아픔은 깊다.

살다보면 정이 들겠지, 아니 엎어지든 채이든

가다보면 앞은 열리겠지, 애써 눈을 들어

먼산을 가늠해보고 또 마음을 다잡는 동안

세월의 머리털은 하얗게 쇠어갔으니,

욕망의 초록이 쭉쭉 뻗쳐오르던 억새풀 언덕에

마른 뼈들 스치는 소리는 생생하다. 그 소리에

삶의 나날의 몸살에 다름아니던 별들은

또 소스라치치다 잦아드는 새벽, 오늘도

푸성귀밭에 나가 오줌발을 세우는 것은

한번도 잡아본 적이 없는 갑오패 같은 그리움

이토록 질기다는 것인지. 어디서 종은 또 울고,

그러면 황급히 말발굽을 갈아끼우고

잡목 덮인 저 황토잿길을 올려다보는

마부처럼, 꿈에 견마 잡힌 우리도 뚜벅뚜벅

발길을 떼야 하는 일이 새삼 절실한데

소슬바람은 부는 것이다. 계절은 벌써 깊어져

우리는 또 한 발 늦는다 싶은 것이다.

한 발 늦는 그것이 다시 길을 걷게 한다면

저 산도 애써 아침해를 밀어올리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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