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 최영미

김춘화
2022-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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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낙원이예요

우리들은 모두 낙원에 있으면서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지요"


카라마조프 형제의 말을 베낀 그날은

흐린 날이었나, 맑았다 흐려진 하루의 끝,

까닭 모를 슬픔이 쏟아지던 저녁이었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 밑에서 낙엽을 줍던 소녀에게

슬픔도 고독도 핑크빛이었던 열다섯 살에게

가장 먼 미래는 서른 살이었다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던 서른을 넘기고

오십이 지나 뻣뻣해진 손가락으로 쓴다

어제도 오늘 같고 오늘도 내일 같아

달력을 보지 않는 새벽,


인생은 낙원이야.

싫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낙원.






최영미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이미출판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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