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 마종기

김춘화
2022-08-07
조회수 220


한동안 펼쳐보지 않았던

오래된 책이

반갑다며 내게 안긴다.

아직도 체온을 가진 종이.


나만 나이 든 줄 알았더니

책도 늙는구나.

눈에 익은 것이 모두

잊지 않고 나이를 보인다.


책을 털고 펼치니

보이지 않던 먼지가 날린다.

무심결에 꾸미고 산다고

감추어두었던 날들이 깨어나

먼지를 날리는 내 어깨.

(그래, 무관심이 제일 힘들었지.)


만나고 헤어지는 사이에

기억의 줄은 느슨해지고

비어있는 시간의 틈새.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채

내가 버리고 온 말들은

오늘 밤 잠이나 깊이 들까.







마종기 시집 <천사의 탄식>문학과지성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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