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관계3 - 신과나눈 이야기

김계희
2018-05-26
조회수 1098

사랑하는 관계가 실패할 때 (사실 실패하는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관계에서 너희가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의미에서의 실패를 빼고는) 그것이 실패하는 까닭은 두 사람이 잘못된 이유로 맺어진 데 있다. (물론 잘못된이란 용어는 잘된 것에 대비되는 상대적인 용어다. 잘된게 무엇이건 간에! 너희 어법으로는 관계가 당사자들의 생존에 완전히 이롭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들과 만날 때, 그 관계는 대부분 실패하거나 변질된다고 말하는게 좀더 정확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관계에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보다는 관계에서 무엇을 얻어 낼 수 있는가란 시각으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관계를 맺는 목적은 네가 차지하고 소유하려는 것이 상대방의 어떤 부분인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어떤 부분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관계, 즉 삶 전체의 목적은 딱 하나뿐이다. 참된 자신이 되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

특별한 누군가가 함께 하기 전까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면 아주 로맨틱하게 들리긴 하겠지만, 기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더 나쁜 건 그런 말은 상대방에게 자기 아닌 온갖 종류의 존재가 되라는 극심한 압박이 된다는 점이다.

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상대방은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때까지 그런 존재가 되려하고 그런 일들을 해낸다. 그러나 결국 상대방은 네가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완성할 수 없게 되며, 내가 부여해준 역할들을 더 이상 해낼 수 없게 된다. , 원망이 쌓이고 분노가 따른다.

마침내 이 특별한 누군가는 자신과 관계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진짜 자아를 내세우기 시작하고, 좀 더 참된 자신의 모습에 따라 행동한다. 네가 상대방더러 진짜 변했다. 고 말하는 게 대략 이 시점이다.

특별한 누군가가 이제 자신의 삶에 들어오고 나니, 자신이 완전해진 것 같다는 말은 아주 로맨틱하게 들리긴 한다. 그러나 관계의 목적은 너를 완전하게 만들어줄 타인을 갖는데 있는 게 아니라, 네 완전함을 함께 나눌 타인을 갖는 데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충분히 체험하기 위해서 특별한 타인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타인이 없다면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략)

그러다 너희는 마흔 살에서 예순 살 사이의 어딘가에서 (대개는 후반보다는 전반기에) 자신의 가장 원대한 꿈을 포기하고, 고귀한 희망을 접어두고, 최소한의 기대와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기로 마음을 정한다.

문제는, 지극히 단순하고 지극히 간단하지만 지극히 비극적인 오해를 하는 데서 생긴다. 즉 너희의 가장 원대한 꿈과 가장 고귀한 이상과 가장 바람직한 소망의 실현 여부가 너희의 소중한 자아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는 오해. 그리고 너희 관계의 지속 여부가 상대방이 자신의 관념에 얼마나 잘 맞춰주고, 자신이 상대방의 관념에 얼마나 잘 맞춰주는가에 있다는 오해. 그러나 관계를 좌우하는 단 하나의 참된 시금석은 너희가 얼마나 자신의 관념에 따라 사느냐는 것이다.

관계는 가장 고귀한 자아 개념을 체험할 수 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회-사실은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것이다. 관계를 타인들에 대한, 너희의 가장 고귀한 개념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회로 볼 때, 관계는 실패로 돌아간다.

관계 당사자들이 자신에 대해, 즉 자신이 되고 있고 하고 있고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자신이 원하고 구하고 주는 것, 자신이 추구하고 창조하고 체험하는 것에 대해 마음쓸 수 있게 하라. 그렇게 할 때만 관계는 관계 자체의 목적과 관계 당사자들에게 훌륭하게 봉사할 것이다.

관계 당사자들은 상대방에 대해 일체 마음쓰지 마라. 오로지 단 한가지, 자신에 대해서만 마음 쓰도록 하라. 너희는 오로지 상대방에 대해서만 마음쓰는 것이 최상의 관계라고 들어왔을 터이니, 이런 가르침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너희에게 말하노니, 상대방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 상대방에게 몰두하는 것이야 말로 관계를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이유이다.

저 사람은 어떤 상태인가? 뭘하고 있는가? 뭘 갖고 있는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원하는 건? 요구하는 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기대하는 건? 계획하는 건?

선각자는 상대방의 상태와 하는 일과 가진 것과 말과 바램과 요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상대방이 뭘 생각하고 뭘 기대하고 뭘 계획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관계에서 자신이 무엇이냐는 것뿐이다. 가장 잘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다.

-아주 과격한 가르침이로군요(닐)

주의 깊게 살펴보면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남에 대한 사랑을 매개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추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자기네가 이렇게 하는 걸 깨닫지 못한다. 그것을 의식하면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 속에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너희가 잠재의식이라 부르는 것에서 진행되는 흐름이다. 그들은 생각한다. 내가 남들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들도 나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따라서 나를 사랑할 수도 있으리라.

이것의 역에는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싫어하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병이다.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사랑해주는 데도, 그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상사병에 걸릴 때 이것은 일종의 병이다. 제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얘기해줘도 그들은 흡족해하지 않는다.

첫째로 그들은 상대방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방이 자기를 주무르려 한다고 생각한다. 뭔가를 얻어내려고. 그들은 죽치고 앉아 어떻게 자기네를 진짜로 사랑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온갖 생각을 다해본다. 상대방을 믿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상대방에게 그 사랑을 증명하도록 만드는 작전을 펼친다. 상대방은 그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이때 그들은 상대방에게 행동방식을 바꾸려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두번째로, 마침내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걸 믿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이들은 이내 그 사랑을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대방의 사랑을 붙들어두기 위해 자신의 행동방식을 바꾸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문자 그대로 관계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다. 그들은 자신을 찾고자 관계를 맺었지만, 오히려 자신을 잃고 말았다.

관계 속에서 이 같은 자아상실이야말로 남녀관계에서 생기는 괴로움의 주요한 원인이다.

(중략)

너희가 서로를 성스러운 여행길에서 만난 성스러운 영혼들로 보지 않을 때, 너희는 모든 관계 뒤에 놓인 목적, 즉 의미를 볼 수 없다.

영혼은 진화라는 목적을 위해 몸에 깃들고,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너희는 진화하고 있다. 너희는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너희는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 결정하기 위해서 모든 관계를 활용하고 있다.

이것이 너희가 이세상에 와서 할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창조하는 즐거움이고, 자신을 인식하는 즐거움이며, 자신이 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일궈가는 즐거움이다. 이것이 자의식을 갖는다고 할 때의 참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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