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노루귀꽃, 이미 나도 흘러왔으니 - 박남준

김춘화
2025-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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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뜰 앞의 산과 강 모든 들판은 꽃들의 세상

묵묵히 지난 시간의 겨울을 견더온 것들이

일제히 광장의 깃발처럼 지상에 나부낀다

얼굴을 맞대고 내걸린다


한 꽃이 피고 지고 그 꽃이 진 자리에 다음 생의 어린 꿈이 자라고 있다

한 꽃이 피고 지고 그 꽃이 진 자리 들여다보게된 시간까지를 흘러오는 동안

내 정신의 안과 밖

끊임없는 새들이 둥지에서 태어나고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동안 내 귀밑머리도 하얗게 흘러왔으리니

이미 나도 흘러왔으니


꽃이 질 무렵 올라오는 노루귀 새 잎새

흰 솜털 보송보송한 솜털 꼭 노루귀를 닮았다

나도 이렇게 솜털 보송거리던 나이가 있었으리

그렇듯 나 이제 검은 머리 새하얀 불귀의 시간

잊어야 할 일들이 많다 노여움은 자주 오고

살아 있는 일이 한갓 꿈같다

봄날, 내 곱고 붉은 사랑들은 일장춘몽이런가

언제였던가 그런 날이 있기나 했던가

까마득하다 가물거린다 아득한 어제다


한때 한 포기의 풀이라면 그 풀의 극점, 꽃처럼 살고자 했으나

줄기라면 잎새라면 아니 땅속 뿌리라면 또한 어떠리

모든 것들의 순간순간 저마다 극에 이르지 않은 것들

어디 없으리 꽃 피우고자 했으나 새순이 뽑힌들,

어린 봉오리로서 세상을 다한들 그들의 한때

아름답고 꼿꼿하지 않은 날들 어찌 없었으리


무수한 날들이다 그 안에 아직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 너 무엇에 사로잡혀 있느냐

흰 노루귀꽃 한 송이가 봄날의 하늘을 건너고 있다

흰 노루귀꽃 한 송이가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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