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씨가 아내와 함께 찾아왔다. 지난해 소포로 <나의 해방일지 OST> CD가 배달되었는데 발신인의 이름은 없고 소포 겉봉에 "No One-선배를 닮은 노래예요."라고 적혀 있었다. 상점에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주문인이 최현명이라고 했다. 몸이 마르고 곱슬머리에 눈이 크고 이가 하얗고 늘 웃는 인상에 그 웃음이 서글서글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후배였다. 별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는데 언젠가부터 늘 해마다 달력을 주문했다. 해방일지 OST를 너무 좋아했는데 30년 가까이 연락도 모르다가 이렇게 선물을 받고 마음이 너무도 뭉클하였다. 현명씨에게 전화해 한시간 가까이 통화를 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착하고 선해서 또 한번 가슴이 뭉클하였다. 오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 이상하고 신비한 기분이 들면서 마음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아주 간혹 연락이 닿은 후배들은 나의 옛날이야기를 한다. 주로 선배들과 친했고, 후배들을 챙기거나 대화를 한 적 없는데도 그 시절 나에 대해, 내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들을 한다. 멋진 이야기 같은 거. 그런데 나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내 인생의 실패한 느낌을 대학에 들어가 처음 느꼈다. 겨울이면 늘 그 실패의 느낌이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마흔이 되었을 때 이 실패한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현명씨가 나를 닮았다는 이 노래를 들을 때면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이십대 시절, 나는 거의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설설설 끓는 열에 들뜬 미친 피가 머리를 관통하면 새벽마다 벌떡 일어나 창가를 서성이며 가슴을 쳤다. 그때 피었어야 하는 꽃이 있었다. 오로지 그 시절에 피어서 만개했어야 할 꽃. 그때 피지 못한, 봉우리 채 시들어버린 그 꽃이 아직도 나의 가슴 아래에 박혀 있다. 내가 훗날 어떤 꽃을 피우더라도 아마 이 실패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언젠가 서진이가 "선생님처럼 이렇게 아뜰리에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싶어요." 라고 했을 때 나는 놀라고 슬펐다. "너는 화가가 되어야지. 선생님은 실패해서 여기서 이러고 사는 거야. 너는 화가가 되어야지." 나는 이곳에서 가슴 아리게 살고 있지만, 너는 다른 곳에서, 더 넓은 곳에서, 그곳에서 가슴 아리게 살아야지.
2025.3.1
희윤 선생님의 전시를 보고 선기형네 갔다가 김마스터 트리오 공연을 한다길래 정규 선배, 영익 선배, 재경이 선배를 불렀다. 명진이와 무창씨도 와서 공연을 보고 술을 마셨다. 명진이가 유학 후 돌아왔을 때 내 달력을 보며 “선배 혁명 안해? 혁명해야지, 혁명!”하고 물었었는데, 십오년이 지난 후에야 대답을 할 수 잇있었다. 거의 쎄나클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는데, 현명씨를 만나고 돌아온 날 박스를 뒤적여 찾은 그때의 사진이 있어서 사진을 보며 다들 추억에 잠겼다.
그때의 세상에는 지금처럼 행복해야 한다는 관념에 시달리지 않아서,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행복이라는 말 같은 건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깨진 창문으로 들어가 실기실에 앉아있으면 기분이 좋고 성취감 같은 것이 있었다. 테레핀 냄새에 가슴이 아렸고, 우리는 대략 가슴이 아린 삶을 살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규성이는 실기실 구석에서 건지앤로지스를 연주하고, 동환이는 혼다 오토바이를 타고, 병길이 오빠는 부자들이 사는 이층 복층 주택에 살았다. 보라색 파카를 입고 머리를 기르고, 늘 돈이 없어서 아무도 그가 부잣집 아들이라는 거는 알지 못했다. 심심한 날이면 미술관 잔디밭에서 뒹굴고, 뒹굴다가 심심하면 잔디를 뜯어 먹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더 왼쪽으로 뒹굴고 뒹굴고, 여기저기서 개 풀 뜯는 소리, 그러다가 지치면 감천으로 갔다.
풍경화를 잘 그리던 동환이는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고, 남겨진 동환이의 풍경화에서는 안개가 많이 낀 날이면 백마가 소리 없이 달려 나오곤 했다. 그 백마를 타고 달리며 늑골이 흔들릴 때면 무언가 가슴이 아려와, 우리가 실패해서 이 작은 소도시에서 이러고 사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되고 싶은 게 없어서 우리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거야. -미래가 뻔해. -오빠, 병길 오빠, 왜 늘 이렇게 늑골이 아프지? -말이 가짜라서. 가짜라서 그래.
우리가 그때보다 멋져졌는지 모르겠다. 더 행복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 미친 피들이 이제는 조용히 잠이 들어서, 하고 싶었던 대부분의 것이 이제는 안 해도 되는 것이 되어버려서.
No One - 김연정
2025.2.29
현명씨가 아내와 함께 찾아왔다. 지난해 소포로 <나의 해방일지 OST> CD가 배달되었는데 발신인의 이름은 없고 소포 겉봉에 "No One-선배를 닮은 노래예요."라고 적혀 있었다. 상점에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주문인이 최현명이라고 했다.
몸이 마르고 곱슬머리에 눈이 크고 이가 하얗고 늘 웃는 인상에 그 웃음이 서글서글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후배였다. 별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는데 언젠가부터 늘 해마다 달력을 주문했다. 해방일지 OST를 너무 좋아했는데 30년 가까이 연락도 모르다가 이렇게 선물을 받고 마음이 너무도 뭉클하였다.
현명씨에게 전화해 한시간 가까이 통화를 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착하고 선해서 또 한번 가슴이 뭉클하였다. 오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 이상하고 신비한 기분이 들면서 마음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아주 간혹 연락이 닿은 후배들은 나의 옛날이야기를 한다. 주로 선배들과 친했고, 후배들을 챙기거나 대화를 한 적 없는데도 그 시절 나에 대해, 내 작업에 대해서 이야기들을 한다. 멋진 이야기 같은 거. 그런데 나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내 인생의 실패한 느낌을 대학에 들어가 처음 느꼈다. 겨울이면 늘 그 실패의 느낌이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마흔이 되었을 때 이 실패한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현명씨가 나를 닮았다는 이 노래를 들을 때면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이십대 시절, 나는 거의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설설설 끓는 열에 들뜬 미친 피가 머리를 관통하면 새벽마다 벌떡 일어나 창가를 서성이며 가슴을 쳤다. 그때 피었어야 하는 꽃이 있었다. 오로지 그 시절에 피어서 만개했어야 할 꽃. 그때 피지 못한, 봉우리 채 시들어버린 그 꽃이 아직도 나의 가슴 아래에 박혀 있다. 내가 훗날 어떤 꽃을 피우더라도 아마 이 실패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언젠가 서진이가 "선생님처럼 이렇게 아뜰리에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싶어요." 라고 했을 때 나는 놀라고 슬펐다.
"너는 화가가 되어야지. 선생님은 실패해서 여기서 이러고 사는 거야. 너는 화가가 되어야지."
나는 이곳에서 가슴 아리게 살고 있지만, 너는 다른 곳에서, 더 넓은 곳에서, 그곳에서 가슴 아리게 살아야지.
2025.3.1
희윤 선생님의 전시를 보고 선기형네 갔다가 김마스터 트리오 공연을 한다길래 정규 선배, 영익 선배, 재경이 선배를 불렀다. 명진이와 무창씨도 와서 공연을 보고 술을 마셨다. 명진이가 유학 후 돌아왔을 때 내 달력을 보며 “선배 혁명 안해? 혁명해야지, 혁명!”하고 물었었는데, 십오년이 지난 후에야 대답을 할 수 잇있었다. 거의 쎄나클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는데, 현명씨를 만나고 돌아온 날 박스를 뒤적여 찾은 그때의 사진이 있어서 사진을 보며 다들 추억에 잠겼다.
그때의 세상에는 지금처럼 행복해야 한다는 관념에 시달리지 않아서,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행복이라는 말 같은 건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깨진 창문으로 들어가 실기실에 앉아있으면 기분이 좋고 성취감 같은 것이 있었다. 테레핀 냄새에 가슴이 아렸고, 우리는 대략 가슴이 아린 삶을 살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규성이는 실기실 구석에서 건지앤로지스를 연주하고, 동환이는 혼다 오토바이를 타고, 병길이 오빠는 부자들이 사는 이층 복층 주택에 살았다. 보라색 파카를 입고 머리를 기르고, 늘 돈이 없어서 아무도 그가 부잣집 아들이라는 거는 알지 못했다. 심심한 날이면 미술관 잔디밭에서 뒹굴고, 뒹굴다가 심심하면 잔디를 뜯어 먹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더 왼쪽으로 뒹굴고 뒹굴고, 여기저기서 개 풀 뜯는 소리, 그러다가 지치면 감천으로 갔다.
풍경화를 잘 그리던 동환이는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고, 남겨진 동환이의 풍경화에서는 안개가 많이 낀 날이면 백마가 소리 없이 달려 나오곤 했다. 그 백마를 타고 달리며 늑골이 흔들릴 때면 무언가 가슴이 아려와, 우리가 실패해서 이 작은 소도시에서 이러고 사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되고 싶은 게 없어서 우리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거야.
-미래가 뻔해.
-오빠, 병길 오빠, 왜 늘 이렇게 늑골이 아프지?
-말이 가짜라서. 가짜라서 그래.
우리가 그때보다 멋져졌는지 모르겠다. 더 행복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 미친 피들이 이제는 조용히 잠이 들어서, 하고 싶었던 대부분의 것이 이제는 안 해도 되는 것이 되어버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