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준영이가 아빠가 되었다. 나에게 아기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는데 제대로 지어주지 못하고 여행을 갔다.
대신 여행에서 아기에게 줄 딸랑이를 선물로 샀다.
준영이가 처음 우리집에 놀러 왔을 때는 준영이가 네살때였다. 나는 학교도 다니지 않은 여섯살때였다.
그 후로 이모님이 준영이를 데리고 홀로 떠돌다가 객사 하였다. 그래서 준영이는 고아로 홀로 살았다.
이모에게 가족이 있는 줄도 알지 못하다가 스물이 넘어 호적을 떼 보고 우리집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어찌어찌한 이유로 이주일을 있다가 떠났고 다시는 볼 수 없었는데 결혼식을 앞두고 전화가 왔었다.
그간 준영이는 우리에게 폐가 될까 하여 소식을 끊었다고 했다.
준영이는 이십 여년을 고아로 살았다. 21세기에 60년대쯤의 아픔을 안고 살았다.
결혼식에서 우리를 보자 준영이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다들 준영이를 안고 울었다.
고생한 사람답지 않게 얼굴이 깨끗하고 착했다.
가족이 없었다면 나는 여러번 죽었을 텐데,
준영아 너는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라는 혼잣말이 저절로 나왔다.
준영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걸 보면 목숨은 모지고 질기다.
오늘은 빛 바랜 사진첩을 들춰보았다.
웃고 있는 얼굴들이지만 사진속의 얼굴들은 왜 이리 애닯고 처연히 여겨지는지,
사진 속의 모든 사람들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듯 여겨진다.
무언가를 사랑해야만 할 것 같고, 무언가 용서를 구해야만 할 것 같은 아릿한 통증이 가슴팍 깊은 곳에서 느껴진다.
하루하루 어머니를 바라보며 하루하루 이별에 대해 생각한다.
기적이 벌어진다면 엄마의 어린 시절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엄마의 처녀시절, 그리고 엄마의 삼십대 시절, 그녀의 속 깊은 친구가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에게 찾아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어른이 되면 많은 것이 좋아질 거라고 용기 되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
2009년
준영이가 아빠가 되었다. 나에게 아기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는데 제대로 지어주지 못하고 여행을 갔다.
대신 여행에서 아기에게 줄 딸랑이를 선물로 샀다.
준영이가 처음 우리집에 놀러 왔을 때는 준영이가 네살때였다. 나는 학교도 다니지 않은 여섯살때였다.
그 후로 이모님이 준영이를 데리고 홀로 떠돌다가 객사 하였다. 그래서 준영이는 고아로 홀로 살았다.
이모에게 가족이 있는 줄도 알지 못하다가 스물이 넘어 호적을 떼 보고 우리집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어찌어찌한 이유로 이주일을 있다가 떠났고 다시는 볼 수 없었는데 결혼식을 앞두고 전화가 왔었다.
그간 준영이는 우리에게 폐가 될까 하여 소식을 끊었다고 했다.
준영이는 이십 여년을 고아로 살았다. 21세기에 60년대쯤의 아픔을 안고 살았다.
결혼식에서 우리를 보자 준영이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다들 준영이를 안고 울었다.
고생한 사람답지 않게 얼굴이 깨끗하고 착했다.
가족이 없었다면 나는 여러번 죽었을 텐데,
준영아 너는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라는 혼잣말이 저절로 나왔다.
준영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걸 보면 목숨은 모지고 질기다.
오늘은 빛 바랜 사진첩을 들춰보았다.
웃고 있는 얼굴들이지만 사진속의 얼굴들은 왜 이리 애닯고 처연히 여겨지는지,
사진 속의 모든 사람들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듯 여겨진다.
무언가를 사랑해야만 할 것 같고, 무언가 용서를 구해야만 할 것 같은 아릿한 통증이 가슴팍 깊은 곳에서 느껴진다.
하루하루 어머니를 바라보며 하루하루 이별에 대해 생각한다.
기적이 벌어진다면 엄마의 어린 시절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엄마의 처녀시절, 그리고 엄마의 삼십대 시절, 그녀의 속 깊은 친구가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에게 찾아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어른이 되면 많은 것이 좋아질 거라고 용기 되는 말을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