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a Thing

김계희
2025-05-06
조회수 57


   Not a Thing


2025.1.21

그런데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서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때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오후에 잠깐 들어오는 햇살에 반짝이던 홀로그램 스티커를 바라보던 순간이, 과일에 꽂은 시계의 전극 주위로 노랗게 곰팡이가 피던 장면이, 그때 사 층 계단을 걸어올라 작업실 문을 두드리던 그 아이의 얼굴이, 그때 우리가 행복했는지 모르겠다. 그 아이가, 내가,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실연했고, 가난했고, 나는 그 작업실에서 그림을 한 장도 제대로  그리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도 전시를 했고, 그때 새로 사귄 애인이 그림을 보러 온 것 같은데, 그의 파란 트럭을 타고 다니며 폴라포를 나눠 먹은 것도 같은데, 그 트럭을 타고 배추를 팔러 다니며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내가 행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외출을 하고, 희윤선생님과 류관장님을 만나고, 권오봉 선생님 전시를 보고, 판화실에 들러 철호 선생님의 새로운 작품을 보았다. 선기 선배와 통화를 하고, 이 십 년이 훌쩍 지난 사람들의 소식을 들었다. 판화실에서 낡은 화구 박스를 하나 얻었는데 화구통 안에 기관이 선배 이름이 있어 선배가 학생 때 쓰던 것임을 알았다. 삼덕동 인쇄 골목에 가니 모든 게 그대로여서 학창 시절 사진을 찍으러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관장님을 따라 덕산 공방에 가서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잠시 앉아 있었는데 선생님의 얼굴이 하도 맑아 깜짝 놀랐고, 나도 저런 얼굴을 지닐 수 있을까 생각하며 괜시리 마음이 울적해 졌다.  오늘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정규형, 영익이형, 수동이 형, 재정이형, 재경이형, 경숙이, 승현선배. 규선선배, 동재선배, 작고하신 유병수교수님과 정점식 교수님을 모두 만나고 돌아 온듯한 기분이 들어 뭉클하였다.

날씨가 퍽 포근하였고, 선생님의 그림들은 아름다웠으나, "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어요." 라고 그림은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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