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드의 왕 (King of Wands)

김계희
202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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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b49e7803aa3d.jpg Zimerman -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 II Adagio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올 때면  나의 세상이 조금 더 나은 쪽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느낀다. 지난번 아버지에게 갔을 때, 아버지의 눈동자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너무나 맑고 깊어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마음을 느꼈다.
나는 한번도 아버지의 오솔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당신의 어린 시절, 놀이와 꿈, 경험했을 가풍과 그래서 가지게 된 취향과 당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행했던 고통스러운 제한과 강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지만,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기에 후회의 말은 할 수 없지만, 시간을 거슬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겠지만,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여 아버지를 분노했던 그 자리에 아버지의 오솔길을 올려 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5학년 가을, 아버지와 처음으로 함께 살게 되었고, 그때 나는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이 그저 귀여운 여자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의 방, 높고 반듯한 천정의 검은 몰딩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렇게 알아차렸다.
긴 복도를 걸어 아버지의 방에 처음 들어간 때를 기억한다. 오빠들이 하교하지 않은 날의 적막한 오후, 아름다운 병풍이 놓인 사랑방을 지나 일본식 미닫이 간살 창호문을 밀어 그렇게 반듯하고 커다란 방을 처음 보던 날, 그 소설같은 느낌을 잊은 적이 없다.
이중으로 된 커다란 간살 창문으로 은은하게 빛이 스며들고, 벽면을 꽉 채운 검은 자개로 만든 파이오니아 전축이 스며드는 빛에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벽인지 문인지 분간할 수 없는 정교한 미닫이로 된 벽장에는 아버지의 모직 코트와 세무 잠바들이 가지런히 일렬로 걸려 있었고 담배 냄새가 스며났다. 전축 위에 반듯하게 놓인 패스포트, 유리병에는 반쯤 동전이 채워져있었다. 벽에는 못하나 박혀 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방은 그게 전부였고, 그리고 내 마음에 처음인 것들이 들어왔다. 우아한 것,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갈한 것, 그리고 엄격하고 단호한 것, 그의 모든 것이 그 방에 있었다. 그날 그 방에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첫번째 메시지가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귀여운 여자아이가 아니라 무언가 훌륭한 그런 것.

육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는 나에게 무언가를 말해주고 싶었던지 어느날 어떤 이야기를 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리고 다른 말은 다 기억이 나지 않으나, 아버지는 '학은 굶어 죽더라도 땅에 떨어진 낱알은 주워 먹지 않는다' 는 말을 했다. 그 말은 나에게 아름다웠고,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아버지를 미워할 리가 없었다.
이토록 가슴이 아픈 이유는 이 삶이 이토록 치열한 딜레마여서, 역방향으로 놓인 완드의 왕을 정방향으로 돌려 놓으며, 그 오랜 시간에 대한 후유증을 고통스럽게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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