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

김계희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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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형-오솔길


드가의 복제화를 끼고 제일 서적 육교를 건너던 날, 그날 오후 나는 도시바 소형 녹음기를 잃어버렸다. 아무 말이나 아무 말이나 집어넣던 녹음기 속의 이야기는 끝을 맺지 못했고, 그날 이후 나는 아무 말이나 아무 말이나, 의미 없는 또 아무 말을 버려진 나무 의자에 대고 부스러진 축축한 나뭇잎에 대고 했다.
늦은 새벽 집으로 돌아오면 잠들어 계신 어머니는 아침이면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매일 어디를 가시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는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꽥꽥 술을 마시고, 꽥꽥 토하고, 꽥꽥 소리를 지르고,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을거면 그림을 안 그리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어머니가 말한 적이 있는 것도 같지만, 어머니의 말은 중요한 게 아니라서, 나는 꽥꽥 그림을 그렸고, 내 소형 녹음기 속의 아름다운 말들은 어느 사이 완전히 사라졌다.


“마음을 평온하게 해 줄 50년대 미드센츄리를 벽에 거세요. 산뜻한 기분이 드는 건 잠시 뿐일 테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 TV의 볼륨은 낮춰두는 게 좋습니다.“
나의 뒤뜰로 다시 폐허가 찾아오고, 잠이 들면 꿈속에는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래된 액자를 꺼내 먼지를 닦고, 삐걱거리는 계단을 따라 오르며 어머니의 그림을 걸었다. 어머니의 전시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오후가 되면 나무 계단 사이에 박혀 있는 못을 주웠다, 그럴 때면 어디선가 날아온 먼지 냄새, 향료 냄새, 낡은 장화에 낀 이끼 냄새, 오랫동안 주문이 쓰여진 종이 냄새, 실패한 마법의 냄새 같은 것을 맡았다.
계단을 오르며 진딧물 냄새를 맡을 때, 그래서 장미가 시들어 갈 때, 이상한 중얼거림 같은 것, 기도 소리 같은 것, 어렴풋이 눈물 같은 것이 들리기도 했다. 
아마 어머니의 그림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뒤뜰 그 폐허에서 들리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주 오래전 이곳에 실패한 마법사가 살았었거나.

 

계단 사이에 박혀 있는 못을 주울 때면 못과 함께 빠져나온 주문들이 종이컵 속에서 웅웅거렸다. 대개의 이야기는 오렌지색 눈동자, 붉은 망토, 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은 것들이다. 자신의 폐허에 걸었던 주문들은 대부분 실패하고 마법이 필요한 자리에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종류의 흔한 동화가 올려졌을 것이다.
나도 이런 동화를 믿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가 느끼는 패배감은, 폐허를 회복하는 것은 동화가 아닌 강력한 마법이라는 자각이었디. 일을 하고, 성취를 하고, 그래서 망각을 하고, 동화는 그것으로 그칠 뿐이다. 그래서 동화는 늘 불충분하고, 잠깐 잠깐의 망각을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대부분의 이해나 공감 같은 건 잠시 열린 문틈으로 그 사람의 폐허를 보는 순간 뿐이고, 모든 이해를 관통하는 그 순간 우주가 잠시 열렸다 닫히는 것 뿐이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때 잠시 동화 같은 것이 이루어지고, 또 그치고, 하지만 마법은 여전히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은 햇살이 투명한 늦은 오후였다. 낮술을 한 동료가 날개처럼 팔을 펼치고 들어와 일층에서 이층으로 어머니의 그림 사이를 날아다니다 기쁜 표정으로 무언가 말을 뱉고 다시 술 냄새를 풍기며 사라졌다. 채도가 빠진 오후의 빛이 스테인드 글라스에 회색으로 스며들고, 낡은 마루 위에 흩어진 깃털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하고 돌아간다. "혼자서 사는 건 참 어렵소."
또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하고 돌아간다. "누가 피아노를 쳐주어 기분이 좋아졌어요."
살아간다는 건 이게 전부다. 혼자 사는 것이 어렵다가, 누가 피아노를 쳐주어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이럴 때는 삶이 투명하게 보인다. 전시회는 곧 끝날 것이고, 잠시 귀가 밝아졌던 어머니는 다시 귀가 먹을 것이고, 그러다가 누군가 잠시 피아노를 쳐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어머니의 폐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알게 된 것은 그러는 동안 폐허가 되어 간 내 자신에 대한 직시였다. 오랫동안 주문이 쓰여진 종이 냄새, 먼지 냄새, 중얼중얼 들리던 그 소리는 어머니가 아니라 나의 폐허에서 들리는 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된 날, 그 밤 내내 나는 울었고, 나의 동화가 실패했음을 알았다. 차마 어찌할 수 없어 세상을 내리고 싶었던 그 밤, 그리고 깊은 밤의 중앙에서 잠시 우주가 열렸고, 기억의 문틈으로 목적 없이 잠시 동화가 열렸다. 그리고 나는 아득한 기억 속의 할레루를, 할렐루의 비둘기를 기억해 냈다.

 

그때는 열살 정도로 기억된다. 개구리들이 자취를 감춘 계절, 한낮의 지루한 태양 아래 우리는 할렐루의 뒤를 몰래 쫓았고, 할렐루가 어느 폐허 된 마당 앞에 멈춰 섰을 때는 하루살이가 노을 속에 윙윙거리는 저녁이었다. 할렐루는 땅을 판 구덩이를 덮은 지푸라기와 그물을 걷어내더니 구부러진 손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구덩이에 넣고 있었다. 구덩이에는 날개 끝이 잘린 두 마리의 비둘기가 할렐루가 뿌린 곡식을 쪼아 먹고 있었다.
그때 마음으로 파고들던 아득하고 아늑하던 파열을 기억한다. 팔과 다리가 꼬여 온몸이 뒤틀어진, 그에게 삶이라는 게 있을 거라고는 믿기 어려운 뇌성마비의 할렐루가 아무도 몰래 구덩이에서 키우고 있는 비둘기. 
하루살이가 더운 머리 위로 윙윙거리고, 할렐루의 뒤뜰로 저녁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아름다움을 느꼈다.

 

시간은 멈춘 듯 고요하고 나는 어머니의 그림을 바라본다. 우리 그토록 닿고 싶었던 꿈, 살고 싶었던 순간들, 그 뒤편 우리들의 폐허 위로 할렐루의 저녁이 내려앉는다.
그래서 나는 한번 만 더 기대하려 한다. 우리가 폐허를 치유할 마법에 실패했더라도, 우리가 중얼거리는 주문이 마법에 닿을 수 없는 단지 동화의 영역이라 하더라도, 지친 채 집으로 돌아온 어느 저녁, 미하엘 엔데의 동화집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면, 나는 제1장 실망스런 제목의 <마법 학교>를 천천히 펼쳐 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는 새벽, 나만 알 수 있는 필체로 “당신의 소형 녹음기를 찾았답니다. 그건 내 고양이들이 오줌을 지리던 소파 아래에 있었어요.“ 라는 글을 발견한다면, 나는 마법이 불가능한 자리에 내 실패한 동화를 다시 올려놓겠다.

 

그 순간 꺼졌던 가로등이 다시 등을 밝히고, 나는 제일 서적 육교를 건너며 새로운 아무 말을 녹음기에 대고 시작할 것이다.
생각에 잠겨 말없이 누워있는 어머니를 향해 나는 "할렐루의 팔이 갑자기 반듯하게 펴졌어요." 라고 말할 것이다.
어머니는 무심한 목소리로  "그렇구나. 얘야." 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제 비둘기를 날려 보내도 되요." 라고 말할 것이다.
어머니는 "그렇구나. 얘야." 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거짓말이 아니예요." 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은 비둘기가 마법사였던 거예요." 라고 말할 것이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돌린 어머니는 "할레루를 그만 쫓아다니렴." 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의 마음은 안심이 되고, 나는 "이제 할레루를 쫒아다니지 않아도 되요.” 라고 말할 것이다.

 

맨드라미가 씨를 뱉으며 출렁이는 저녁, 손잡이가 깨진 솔방울이 그려진 찻잔 위로 따스한 수증기가 다시 피어오르고, 내가 어머니에게 했던 모든 후회의 말들은 수증기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마루 위에는 시원한 니스 향이 번지고, 화단의 잎들은 저녁 빛에 반짝이고, 꿈속에는 다시 소녀들이 춤을 출 것이다.

 

<2024 페인팅레이디 동화달력-엄마의 나라에서>에 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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