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듈럼

김계희
2019-09-27
조회수 297

러시아 물리학자가 바담 셀란드가 5권에 거쳐 쓴 <리얼리티 트랜서핑>에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팬듈럼이라는 에너지체에 대한 설명이 있다. 팬듈럼이라는 에너지체의 작동방식은 나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이 될수도 있겠다.
팬듈럼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자면, 분리된 개인들이 하나의 방향의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온갖 조직체들이 생겨나고 발전해 간다. 그러면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하고, 그 결과 조직체는 커져서 힘을 얻고, 구성원들에게 정해진 규칙을 따를 것을 강요한다. 이것이 물질적으로 현실화 될때 집단의 생각이 한 방향으로 촛점이 맞추어지고, 그 결과
로 각자의 사념 에너지의 매개변수가 동일해지고 그때 하나의 구조체가 생겨나는데 이 에너지가 합쳐져서 독자적인 에너지체인 <팬듈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의 사념 에너지에 의해 그 특질이 형성된 모든 구조체가 바로  팬듈럼이라는 것인데, 이 단위 팬듈럼이 모여서 하나로 흔들리기 시작하면 집단 팬듈럼이 된다. 지지자들을 많이 가진 집단 팬듈럼은 형태도 없이 하나의 독립적인 상부로서 지지자들 위에 군림하면서 법을 만들어 내는데, 팬듈럼 안에서 지지자들은 자기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펜듈럼의 법칙데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팬듈럼은 각자의 사념, 생각들의 반응으로서 만들어 진다. 팬듈럼은 이 에너지를 통해  탄생하고 그 에너지를 먹으며 커진다. 비유하자면 요즘의 조국 장관에 관해 각자의 에너지들이 반응할수록 팬듈럼이 생기고 커지기 시작하는데, 이렇듯 모든 패듈럼은 고유의 특징적 주파주를 가지는데, 팬듈럼을 지지하는사람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그 팬듈럼은 커지고 강해지고 확장되고, 지지하는 지지자들의 숫자가 줄어들면 팬듈럼의 흔들림은 느려지다가 결국 흔들림을 멈추게 되어 이 팬듈럼은 한 존재로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은 팬듈럼의 사소한 몇가지 예는 그리스 로마의 다신교, 고대무기, 패션, 레코드판 등 우리의 모든 부분을 에워싸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학자는 팬듈럼이 살아있는 존재인지 아니면 단순한 에너지체인지 단정하지 않는다. 이 학자는 트랜서핑이라는 그 방법에 대해 설명을 하기 위해 팬듈럼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살아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팬듈럼의 특징은 지지자 개인의 운명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다는 것인데, 그것은 지지자 개인으로부터 에너지가 끊임없이 흘러 들어와 팬듈럼 스스로를 키워 나가는 것이 팬듈럼의 유일한 목적일 뿐, 그것이 지지자 개개인에게 이익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팬듈럼이라는 본질 자체가 파괴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팬듈럼 본질 자체가 파괴적이기 때문에 파괴적인 팬듈럼 아래 놓이게 되면 그 인생이 처참해지기 쉬운데,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팬듈럼은 개인의 행복이나 불행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지지자는 그 시스템 아래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행복을 누리며 그는 지지자로서 팬듈럼에게 에너지를 주는 댓가로 팬듈럼은 그에게 만족할만한 환경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 팬듈럼 아래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있는데 예를 들자면 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이러한 유사한 인물들은 모두 파괴적인 팬듈럼을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팬듈럼은 어떤 경우에도 지지자들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으므로 오로지 그들을 자신의 목적에만 이용할  뿐이기에 그 지지자가 팬듈럼의 규칙을 깨는 순간 그의 사념 에너지의 주파수는 팬듈럼의 진동주파수와 일치하지 않게 되며 자신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받지 못하는 펜듈럼은 그 지지자를 내쫓거나 파괴시킨다. 우리가 어떤 조직안에서 생활하면서 그 조직이 향하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되는 의견을 피력할때 조직원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내몰리게 되면 우리는 그 조직에서 나오거나 아니면 그 조직 안에서 스스로 파멸될수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팬듈럼이 지지자를 얻기 위한 싸움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예는 전쟁을 들수 있겠다. 펜듈럼은 지지자를 설득하여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 그 시대에 알맞은 명분을 세운다, 지금으로선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그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 것을 팬듈럼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해가 될것이다.  이러한  파괴적인 펜듈럼은 뚜렷한 속성을 띠고 있기에 알아차리기 쉽다. 파괴적 팬듈럼은 더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항상 자기와 유사한 에너지체와 경쟁하고 최대한 많은 에너지를 얻기 위한 투쟁에서 더 공격적으로 행동할수록 더 파괴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흔히 좋은 인식을 가진 동물보호 단체나 자선단체도 팬듈럼이라는 지배아래 있음을 설명한다.  이 단체들이 왜 파괴적인가 묻는다면 그 팬듈럼 또한 개인의 행복에 관해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이 파괴적인 점인데, 그 팬듈럼은 자선을 베풀라고 말하지만 정작 개인의 행복에는 무관심하기에 자선을 베푼다는 의의 속에서 개인은 힘들게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관이 없다면 개인은 거기서 행복감을 느끼고 그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 들일것이고, 그렇다며 그 사람은 자신의 팬듈럼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베푸는 온정이 가면인지, 혹은 자신이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자선을 하는 연기를 하는 것인지 자신을 거울에 비쳐 스스로에게 물어볼때  자신이 어떤 팬듈럼 아래 있는지를 구별할수 있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또한 종교집단이나 사회운동단체, 학파, 정치, 그리고  자신이 말하고 있는 트랜서핑 자체도 팬듈럼될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팬듈럼의 파괴적인 정도는 저마다 달라 어떤 팬듈럼은 최악의 경우에도 훨신 더 덜 파괴적으로 될수 있다는 설명이다.

몇해전 이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인식에 무척 고무되었고, 사소하게는 나를 지배하는 펜듈럼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주 많은 부분 많은 종류의 팬듈럼 아래 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의 가장 강력한 팬듈럼은 <아버지>라는 팬듈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내 삶에 대한 해석을 하도록 도와 주었다.  
최근 정치라는 거대한 집단적 팬듈럼에서 느껴지는 광기와 파괴적인 속성은  전반적으로 삶을 회이하게 만든다. 노무현 대통령의 논두렁 시계를 어떻게 언론이 양산하고 개인의 정신을 지배했으며 집단적 광기로 내몰았는지,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에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게 했는지는 이 팬듈럼을 이해하면 설명이 된다. 언론은 이러한 속성을 잘 알고 있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선동에 앞장서고 이 선동에 반응하는 에너지체가 생기면  팬듈럼이 탄생하고 진실이나 거짓에 상관없이 커진 팬듈럼이 승리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인식하기 전에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더 강력한 팬듈럼에 빨려들어갈 수 있다는 것인데, 나의 해석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더 많은 지지자를 확보한 팬듈럼에 자신이 에너지가 반응하기 쉽고  그 주파수가 그 팬듈럼과 일치하는 순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팬튤럼의 지배 아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속해 있는 팬듈럼과 반대되는 팬듈럼이 커지면  자신이 지지하던 팬듈럼 아래서 입을 닫게 되고 소극적이게 되고  결국 무관심해져  그러한 사람들을 가진 팬듈럼은 결국 죽게 된다. 세상이 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쪽으로 흐르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인데 팬듈럼의 속성상 이 흐름에 정의(義)라는 것은 부재되어 있다. 지치는 대립은 정치 혐오를 만들어내고, 극도의 혐오는 무기력을 불러오고, 결국 무관심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 팬듈럼은 에너지를 가져올 수 없기에 죽는다. 


팬듈럼에게서 망기지지 않고 안전하게 떠나는 것은 그 팬듈럼으로부터 무심해지는 것이라고 책은 설명한다. 우리는 고민하고 분노하고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소리치며 거리로 나가지만, 우리가 팬듈럼의 지배 아래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때 우리는 최대한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정의(義)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더 많이 생길때 그것은 또 다른 팬듈럼을 만들어 낼것이나 나와 세상을 위해 덜 파괴적일 수 있는 팬듈럼이라면, 그 팬듈럼이 계속 살아 있을 수 있도록 에너지를 보내고자 한다. 정의와 탐욕, 그 역사의 반복은 계속 되고 있고, 우리는 선택하지 않음으로 선택하고 있음을 행위한다. 그러기에 진실을 보기 위해 노력하고, 정의를 판단하려 애쓰며, 선택하지 않음으로 선택하는 행위를 경계하고, 행동은 분명한 선택을 통해 행위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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