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

김계희
2018-01-15 13:48
조회수 292


서진이는 언제나 학교에서 만든 도시락을 싸서 이곳으로 온다. 그 도시락을 펼쳐 나와 아이들에게 나눠준다.
“서진아 너는 왜 안 먹어?” 그러면 서진이는 대답한다. “저는 학교에서 많이 먹었어요.”
서진이는 매번 냉장고를 뒤져 먹을 것을 싸서 이곳으로 온다.  자신은 하나도 먹지 않고 친구들이 먹는 걸 지켜본다.
그럴때면 나는 또 묻는다. “서진아 너는 왜 안 먹어?”  그러면 서진이는 또 대답한다. “저는 집에서 많이 먹었어요.”
아직 이학년인 서진이의 꿈은 화가다.


겨울밤, 트럼펫 소리 울려퍼지는 우리의 교정은 따뜻하고 우아하여서 우리는 모두 화가를 꿈꾸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처음부터 알았던 우리들은
연탄 두 장이 타고 있는 작업실에서 언 손을 비비면서도,
의심의 여지없이 화가를 향해 달려갔다.

나뭇잎들이 다소곳이 내려앉는 저녁, 고요히 누운 교수님의 목소리는 슬펐다.
“내가 쓸모없는 것을 가르쳐서 미안하구나...”
그분이 떠나시던 날 우리는 많이 울었다.
동물원 앞에서 겨우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죄송하여서,
돌멩이에 색칠을 하고, 매일 두 장씩 그린 그림을 중국으로 보내는 일이,
그런 쓸모없는 일을 하는 우리가 죄송하여서 많이 울었다.
1999년 2월의 밤은 너무나 추워서,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그림이 고독하여서,
어찌할 수 없는 생각에 나는 빠져들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우리의 꿈이 실패했다는 것을.

화가가 되고싶다는 아이들에게 화가가 되라는 말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림이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진이가 두 번째 그림을 그리던 오던 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이 아이가 훗날 화가가 되어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랬듯, 우리들이 그랬듯, 아이는 자신이 가야할 정확한 방향을 알고 있었고,
몇 번의 생을 거쳐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온 듯 너무도 익숙하게, 묵묵히, 그리고 뜨겁게,
스스로 고치를 짜는 누에처럼 쉼 없이 오래된 기억을 풀어내는 모습을 나는 지켜보았다.
돌아갈 때면 언제나 목마른 듯이 “선생님, 매일매일 선생님과 그림만 그리며 살고 싶어요.”
그럴 때의 눈은 언제나 무언가를 말하고 있어, 나는 그 눈 속에 든 먼 생의 과거와 미래를, 어린 날의 나를 만나곤 했다.

우리는 모두 앎을 가지고 세상에 와, 어떤 이는 정확히 그것을 기억해내고 바로 앎으로서의 삶으로 돌입하고,
어떤 이는 최선을 다하지만 아주 어렴풋이 일부를 기억해내고, 어떤 이는 그 기억을 외면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앎을 가지고 세상에 온 우리들은 그 앎을 기억해내고 그 앎대로 생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아름다움, 가슴 뜀, 행복과 전율의 마음이다. 우리는 그것을 실컷 누려야 하고 최선을 다해 찾아야 한다.

“선생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몇 번이나 여기를 왔었어요.
그리고 문밖에 서서 선생님이 창문에 붙이고 간 글씨를 읽고 또 읽곤 했어요.
이게 선생님의 글씨구나 하며 선생님을 생각했어요.
여행에서 돌아오셨으니 이제는 계실까 해서 그저께도 찾아왔어요.
오늘 다시 수업을 시작하니 혹시나 일찍 오셨을까 해서 두시에도 왔다가 돌아갔어요.”

이 아이를 어떻게, 어느곳으로 데려가야 하는 것일까...
이 작은 아이가 그 깊은 사랑으로 나를 고뇌에 젖게 해, 이 아이의 열망에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눈물이 흐를 때가 있다.
언젠가는 이 아이에게 이야기 해주어야 할 것 같다. 고독에 대해, 아름다움에 대해, 그리고 우리를 거쳐간 시간과 그리움에 대해.
"서진아, 네가 이미 아는 거란다. 네가 그림을 알고 태어난 거란다.
꽃이 아름다움을 저절로 알고 피어나듯, 나비가 꽃에게 가는 길을 저절로 알고 날아가듯,
우리가 아름다움을 이미 알고 태어나 너는 그림으로 그것을 찾아가려는 거란다.
지금은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를 테니 기억해 두렴.
언젠가 네가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오면 이 말이 기억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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