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인 말들

김계희
2019-08-06
조회수 241



“이곳은 왠지 고장 난 시계가 어울리는 것 같아요.”라고 재범이가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이 오랫동안 내가 기다려온 말처럼 생각되었어.
어느 먼 낯선 나라에서 맞이하던 눈처럼 아름다웠지.
어떤 말들은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곤 해.
우리의 시계는 그래서 5시 2분 전에 멈춰져 있어.


선생님에게 가장 아름다움은 무어예요? 라고 소윤이가 물었을 때,
저에게 가장 아름다움은 이곳이예요. 라고 연우가 대답했을 때,
내가 어떤 것으로부터 치유되고 있음을 느꼈을 때, 그건 너희들의 말이었어.
선생님이 좋아하실 풍경이 있어서요.라며 여행을 떠난 선재가 보내온 사진이,
꼭 그림을 완성해서 다시 올게요.라며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병현이의 말이,
자꾸만 나를 어느곳으로 데려갔어. 그곳에서 나는 또 나에게 처음인 말들을 만났어.


너희들은 언제나 정확한 말을 해. 가감 없이 깨끗하고 분명한 언어.
그 단순한 말은 그래서 힘이 있고 많은 것을 변화시키지.
바닥에 떨어진 지우개 가루, 과자 부스러기들을 쓸어 담을 때면 거기에 묻어 있는 너희들의 말을 봐.
너희들이 우루루 빠져나간 뒤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의 발꿈치를 따라 다니지.


이곳은 참 좋아. 이른 새벽 갈매기 소리에 잠을 깨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분홍빛 여명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하늘을 가득 채우지.
너희들의 말은 이곳 하늘까지 나를 따라와 나를 물들이곤 해.
그 창가에서 너희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노트에 쓰곤 한단다.
하지만 쓰다보면 늘 너희들의 말을 쓰고 있었어.


언젠가부터 나의 삶은 외운 단어가 하나씩 지워지며 점점 얇아지는 단어장 같았어.
그렇게 많은 단어를 외웠는데도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 갔어.
잃어버렸는데, 그게 무엇인지 몰라 찾을 수가 없었단다.
하지만 너희가 하는 별것 아닌 말, 아무것도 아닌 말,
그 말들은 늘 고요히 가슴을 적셔 참되고 진실한 것을 기억해 내게 했단다.


어른이 되어서도 선생님이 생각날 것 같아요. 라는 나윤이의 말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같아요, 라는 선우의 말이,
너희들의 말은 너무나 정확히 내 귀에 들려서, 그 소리를 따라가는 게 너무나 쉬웠어.


선생님은 아티스트고 정직하기 때문이예요. 라는 서진이의 말이
후두둑 내 마음에 떨어졌을 때,
나는 부끄러웠어. 고개를 돌렸지.
하지만, 가장 고귀한 것을 처음 마주한 눈처럼 가슴이 떨렸어.
그리고 알게 되었어. 그 말이 나를 결정짓게 했어.


언제나 나보다 먼저 결정된 말들, 나 자신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말들,
그 말이 틀리지 않도록, 처음으로 나는 그곳으로 걷고자 했어.


우리의 시계는 여전히 5시 2분 전에 멈춰져 있어.
그 속에 너희의 말들이, 많은 것을 바꿔 버릴 깨끗한 말들이 힘차게 빛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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