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 춘앵각 (上)

김계희
2017-11-27
조회수 1192

작성일 2011년

‘춘앵각’은 대구 만경관 주차장 입구 왼쪽에 자리 잡은 요정(현재는 한식집)으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집이다. 옛 주인 나순경 씨는 한국전쟁 때 피란 와 ‘요정인생’을 시작했고, 1969년 자기 요정을 차렸다. 대구의 요정은 1960~8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 요정 춘앵각을 비롯해 종로의 가구골목 양쪽으로 50여 개의 요정이 있었다. 죽림헌, 삼한관, 보현관, 계림관, 대구관, 미조리, 석빈, 석궁, 백록, 가미 등이다.
춘앵각을 거쳐 간 기생들은 수백 명이 넘고, 훗날 대구의 요정과 한식집의 선두주자로 자리 잡은 사람도 20여 명이나 된다. 그래서 춘앵각은 흔히 ‘기생 사관학교’로 불렸고, 그 집 주인 나순경 씨는 대구 요정업계의 대모로 불렸다.
춘앵각을 즐겨 찾는 손님들은 대부분 각계의 수장들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정·재계의 수많은 인사들이 문턱을 넘나들었다. 거물들이 워낙 많이 들락거려 관선시절 경북도지사 정도 되는 손님은 문간방에서 술을 마셔야 할 정도였다. 춘앵각 기생들은 저마다 한두 가지씩 사연을 갖고 있었다. 사연은 달랐지만 그들은 자기 가게를 갖겠다는 꿈을 갖고 살았다. 요정 아가씨로 출발해, 마담이 되고 사장이 되는 것은 '물장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1990년대 요정경기가 바닥에 닿으면서 아가씨들은 떠났고, 요정도 하나 둘 사라졌다. ‘춘앵각’도 2003년 문을 닫았다. 아래 이야기는 춘앵각을 거쳐 갔던 수많은 기생들의 이야기를 한 사람의 사연으로 극화한 것으로, 기생으로 살았던 여인의 삶을 보여준다.



매일신문 [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나다] 춘앵각 (上) / 글 김계희


나비도 벌도 날아들지 않았다. 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성(性)이 없는 무성화(無性花)였다. 수술과 암술이 퇴화하여 종자를 맺지 못하니, 나비를 부르고자 향기를 품을 이유가 없었다. 미혹의 향기에 벌과 나비가 날아들어 급기야 씨를 맺는 꽃들의 모습이 스님들의 분심을 일으킬까 경계해 사찰에 심어지는 꽃이었다.
향진(香眞) 김운심이 불두화를 춘앵각 마당에 삽목하여 기르고 꽃을 피웠을 때, 춘앵각 주인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끌끌 혀를 찼다.
“남자가 들끓어야 하는 기생집을 비구니 굴로 만들려느냐.”
주인은 향진의 심경에 일고 있는 바람이 사뭇 걱정스러웠다. 14년 전 아홉 살이던 김운심을 거두어 기생으로 기른 것이 운심의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였던가 고뇌에 빠지게 했다.


김운심이 아이던 시절, 운심이 동냥을 얻으러 춘앵각의 대문을 두드리던 날, 그릇에 붙은 밥알을 남김없이 긁어 먹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던 주인이 물었다. “너 여기 살며 기생이 되간니?”
아이가 대답했다.
“기생이 무엇인가요?”
“기생? 기생은 하늘과 땅의 중간 세상에 사는 여자 신선이지. 하늘 세계에 속하지도 못하고 땅 세계에도 속하지 못하지만 기생이 되면 배곯을 일 없고, 하늘 밑 여자 신선이 되어 땅 위의 사내들을 골릴 수도 있지.”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세상에 대한 맑은 호기심으로 빛나는 천연스런 눈빛이었다.


아이는 자라면서 제 삶의 몫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았다. 무엇이든 빨리 익히고, 사람의 마음을 먼저 알아차려 행하니 주위의 귀여움을 받았다. 아주 빼어난 얼굴이 아니었고 특별한 몸짓이 아니었지만 그 몸짓에는 배워 익힌 교태가 아닌 타고난 요염이 있었다. 힘찬 태양처럼 밝다가도 고독한 달처럼 차가웠고, 춤추는 바람처럼 흥겹다가도 깊은 바닷속처럼 고요해졌다. 남자를 공손히 받들면서도 속으로는 조롱하는 기개가 있었고, 그것은 남자들의 가슴을 한껏 부풀게 만들었다가 애타게도 만들었다. 그것에 더욱 이끌리는 것이 사내였고, 아이에게는 한번 끌어들인 마음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비상한 말재주가 있었다. 주인은 아이가 타고난 기생이라고 생각했다. 주인은 아이에게 ‘향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미타부처께서 12보살을 거느리니 그 보살들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인간의 모습으로 인도환생하고 있습니다. 그 중, 열한 가지의 얼굴로 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십일면보살이 있었습니다. 신들의 각기 다른 표정과 성정에 맞추어 그들의 고뇌를 들어주며 평정을 돌보던 보살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보살이 하나의 신에게 너무 빠져든 나머지 다른 신들의 이야기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신들의 노여움을 사 수만 가지 얼굴이 있는 인간 세상에 내려가 그 얼굴을 다 접하며 평정을 찾으라는 명을 받고 쫓겨났습니다. 십일면보살이 십일면의 얼굴로 기쁜 이에게는 기쁘게, 슬픈 이에게는 슬프게, 그들의 이야기를 제 일처럼 듣고 나누니 이번 생(生)에 제게 화현한 보살은 십일면보살입니다. 선생께서 제게 오신 이유는 제 전생의 부덕함을 채워주기 위함이니 오늘 이 자리가 참으로 의미롭습니다. 선생께서 대세지보살로 화현하여 제 행동을 시찰하고 바로잡아야 하는 임무를 가졌으니, 오늘 선생께서는 제가 손님들을 대하는 십일면행이 어느 한쪽 치우침 없는지 살피시어 부처께 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술을 따르는 몸으로 감히 도도한 속내를 비친 말이었지만, 그 거절의 말에는 상대방을 격상시키는 품위가 있어 손님들은 무릎을 탁 치며 호탕한 웃음을 웃고 마는 것이었다.
“내가 십일면보살의 그물에 걸려든 가자미일세. 오늘 이 가자미의 애정이 대세지행으로 연결되어 향진의 업을 푸는 데 한몫 할 것이네. 껄껄.”


향진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남자들은 자신이 향진과 전생의 한때를 보낸 듯한 착각에 빠져들어 향진에게 더욱 각별한 애정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그 애정에 응하는 향진의 가슴은 차갑고도 무심하였다.
“그곳에는 일 년에 단 스무날 동안 꽃이 핍니다. 그리고 스무날이 지나면 꽃은 가래 같은 허연 꽃씨를 날리며 모래 위로 푹푹 쓰러집니다. 아름답지만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기에, 사람들은 스무날이 지나면 자신들이 꿈을 꾼 거라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배앓이를 하던 처녀가 꽃이 피는 스무날 동안 일곱 마리의 짐승과 한 명의 사내아이와 교접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사내 아이가 ‘자고’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생에 온 선생이셨습니다.” 향진의 이야기는 기괴하고 음탕했지만,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격조가 있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이면 남자들의 눈은 술보다 향진의 이야기에 취해 흔들렸고, 여자들은 훌쩍훌쩍 옷고름을 적셨다.
한번은 향진의 이야기가 열나절 동안 이어진 적이 있었다. 그 일이 장안에 퍼져 향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춘앵각 주인은 그런 향진을 더욱 아끼고 예뻐했다. 하지만 제 몫의 삶을 다하고 있노라 믿는 향진의 내면으로는 짙은 황토빛의 허허로움이 잦아들고 있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향진의 마음은 그 삶을 진저리치고 있었다.


정암(淨巖) 이무겸이 춘앵각을 찾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향진의 권태로운 애수가 복사꽃 그림자와 함께 검기울어가는 봄밤이었다. 기척도 없이 대문을 열어젖히고 마당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정암을 보았을 때, 향진은 그가 자신을 찾아온 손님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들어와 앉는 모습이 한 마리 독수리처럼 위용이 넘쳤다.
정암은 향진을 마주하고 그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만 볼 뿐,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가을 물빛처럼 차갑고도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향진은 그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자신을 압도하는 것을 느끼면서 가슴속에 뜨거운 열기가 훅 뻗쳐오름을 느꼈다. 그 정적 속에 흐르는 긴장감,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심장이 옥죄이고 불덩이를 삼킨 듯 가슴이 화끈해지는 그 생경한 느낌 앞에서 향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암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두어 번 고개를 들어 뚫어지게 향진을 쳐다본 것 외에는 꼿꼿한 자세로 몇 잔 술을 들이켰을 뿐, 내내 아무 소리도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훌쩍 자리에서 일어나 춘앵각을 들어올 때와 같이, 바람 같은 걸음으로 성큼성큼 대문을 빠져나갔다.


그뿐이었다. 담벼락 위로 떠오르던 달이 소리 없이 하늘을 한 뼘 더 기어올랐을 뿐,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한 점도, 떨어지는 복사꽃잎 한 장도 없었다. 그럼에도 향진은 사라지는 정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온몸에서 잉잉대며 터져 나오는 참을 수 없는 기쁨과 설렘에 몸을 떨었다. 그날 밤, 향진은 정암을 통해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던 어렴풋한 갈망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알았다. 그것은 천상(天上)에의 갈망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몸과 마음이 그 갈망으로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십일면보살이 열한 가지의 얼굴로 각기 신들의 기쁨과 슬픔에 비위를 맞추듯 내 신분이 그러하고 운명이 그러합니다. 하나의 신에게 열중한 죄로 지상으로 쫓겨와 오히려 수만 가지 얼굴과 만나게 되었으니 그 업이 참으로 고단합니다. 밖으로는 누구나 흠모하지만 안으로는 폭포 같은 고독이 흐르니, 품으려는 이는 많아도 나를 위해 희생할 자가 없어 마음이 초라합니다. 하지만 그 고단함 속에서도 하늘에서 맺었던 인연을 지상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소망이 하루하루를 살아내게 했나 봅니다. 스님께서 오시던 날, 저는 스님이 제가 찾아 헤매던 하늘의 그 얼굴이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기생의 몸입니다. 타고나길 천한 몸과 마음이어서 이런 몸과 마음으로 밖에는 이 갈망을 채울 수 있는 다른 도리를 알지 못합니다. 원컨대 부디 한 번만 저를 품어 주신다면 이 밤의 기억을 간직한 채 만 가지 얼굴로 전생의 업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정암은 노기 어린 눈으로 향진을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선발로 달려 나와 무릎 꿇고 간청하는 향진을 정암은 냉정히 뿌리쳤다. 그때 향진은 정암의 눈동자에서 아주 오랜, 기억하지도 못할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무자비하리 만치 냉정한 눈동자를 보았다.


향진의 어미 심순녀는 평안남도 평원 출생으로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가던 도중 도적떼를 만나 아버지를 잃었다. 그때 심순녀를 거두어 준 것이 김시명이었다. 짐승떼를 쫓아 벌판을 누비는 사냥꾼이었다. 남편 김시명은 기개가 넘치고 과묵하였고, 그의 눈은 항상 다른 세상을 쫓고 있었다. 가끔 그가 허망에 찬 눈으로 먼 데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면 심순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그 눈동자에 깃든 산맥처럼 굽이치는 갈망이 심순녀는 늘 두렵고 불안했다.
“가뭄이 네 달간 이어지던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사냥을 떠난 남자는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늘 위로 하나 둘 별이 뜨고, 백당나무 아래서 남자를 기다리던 여자는 스산한 바람이 목 언저리를 스칠 때에야 남자가 자신을 영영 떠나간 것임을 알았습니다. 남자가 그날 발견한 것은 여섯 가지 색이 깃든, 생전에 본 적 없는 찬란한 날개를 가진 새였습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의 눈은 번쩍 빛이 났습니다. 큰 들판을 사이에 두고 남자는, 자신의 삶 안에 들어온 모든 것들이 한 푼어치의 값어치도 없었노라 선언하듯, 그때까지의 모든 삶을 뒤로하고 숲을 향해 달렸습니다….”
여자는 삼백 일을 백당나무 곁에서 서성이다가 스스로 우물에 빠져 죽었다. 아무도 그것이 향진 자신의 아비, 그리고 어미의 이야기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 후 스무날 동안 꼬박 비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비가 그친 뒤 스무날 동안 뿌리마저 말라버린 백당나무에 꽃이 만개했습니다.”


향진은 오랜 기억 속 그 아비의 단호한 눈동자를 정암에게서 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 아래 스치던 정암의 한줄기 흔들림은 보지 못했다. 정암이 춘앵각을 찾은 두 번째 밤이었고, 마지막 밤이었다.

(다음 주 하(下)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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