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 박태준과 동무생각

김계희
2017-11-28
조회수 783

작성일 2011.3



매일신문 [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나다] 박태준과 동무생각 / 글.김계희


태준은 하숙집에 도착하자마자 급한 손길로 오선지를 펼쳤다. 바닷가에서 떠오른 음률을 잊지 않으려는 듯 음표를 그려나가는 손길이 돛에 이는 바람처럼 빠르고 거침이 없었다. 태준은 완성된 악보를 바라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고 두 손을 가슴에 포개었다.
“형…!”
태준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희미하게 터져 나왔다.


 1년 전 태준이 마산의 창신학교 교사로 오던 날, 교실 창밖으로 펼쳐진 월포 바다 빛을 바라보며 형을 떠올렸었다. 형이 번역한 그 노랫말처럼, 어디로 떠나가 영영 돌아올 줄 모르는 형에 대한 그리움에 저도 모르게 '클레멘타인'을 나직이 읊조렸었다. 연희 전문학교 졸업 후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로 진학한 형은 어딜 가나 그 재능이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학생 기독교 청년회 주최 음악회에서 독창을 불러 당시 인기 성악가였던 윤심덕 이상의 호평을 받기도 했고, 유학생 야구팀이 대구에서 원정경기를 할 때 투수로 출전하여 홈런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유학 중 폐결핵에 걸려 돌아온 형은 24살의 나이로 그 아름답던 생을 마감했다. 태준은 형의 그 멋진 홈런이 그리웠고, 그윽하고 맑은 목소리로 부르던 '저 멀리 티페레리'(It's Long Way To Tipperary)가 그리웠다. 태준은 형이 더 많은 노래를 작곡해야 하고, 아름다운 외국 음악을 우리나라에 알려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클레멘타인’의 구슬픈 음률을 읊조릴 때면 태준은 형처럼 자신도 작곡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음악으로 옮겨 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기에는 못다 이룬 형의 꿈을 제 손을 통해 이루어주고 싶은 소망도 아득히 깔려있었다. 하지만, 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동요도 몇 곡 작곡하긴 했지만 형과 같은 가곡을 만드는 데는 자신이 생기지 않는 터였다.
태준은 오선지 위에 그려진 음표를 따라 부르며 고요히 차오르는 기쁨에 몸을 떨었다. 후에 기회가 된다면 은상에게도 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창신학교 설립자의 아들이자, 창신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노산 이은상은 태준이 지은 동요를 좋아했다. 태준보다 세 살 아래였지만 시를 쓰는 탓에 그 정서가 서로 닮아 태준은 은상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했다. 은상과 함께 노비산 언덕에서 바라보는 월포의 일몰을 좋아했고, 노마산에서 구마산으로 가는 다리 위에서 삶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노라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은상은 태준이 오르간을 만나게 된 날, 그때 건반에 손을 올릴 때의 떨리던 느낌, 푸른 담쟁이 가득한 청라언덕과 좁고 긴 90계단이 아름다운 태준의 고향 이야기를 좋아했다.


“11살 때 학교 아담스관의 벽돌을 바라보며 있을 때였어요. 아담스관은 대구 읍성이 허물어질 때 그 벽돌로 지은 건물이었는데 전 그 벽돌의 오색창연한 색깔을 좋아했지요, 그때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 왔어요. 소리를 따라가니 어떤 상급생이 커다란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에 그만 넋이 빠지고 말았답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심하게 방망이질 쳤어요. 연주를 마친 상급생이 저를 발견하고는 제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저를 건반 앞에 앉게 했지요. 떨리는 손으로 건반 하나를 눌렀는데 묵직하면서도 아득한 음색에 머리칼이 빳빳해지는 것 같았어요. 그날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오르간을 연습했어요.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오르간만 생각했지요. 혼자서 찬송가 400곡을 4부로 치게 되었고, 결국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게 되었어요. 전 그 형이 알토와 소프라노 두 음을 동시에 치는 모습을 보며 그 악기에 완전히 빠져버렸답니다.”
태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은상은 꿈결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하곤 했다. “박 선생님의 이야기는 언제나 고운 시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날도 태준은 은상과 함께 노비산 언덕에 앉아 있었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이 둘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여 열띤 토로 끝에 둘은 차라리 입을 다물고 말았다.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문득 은상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태준에게 물었다
“그런데 박 선생님, 선생님의 첫사랑은 어떤 분이셨나요?”
은상의 뜬금없는 질문에 태준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첫사랑은 뭐, 한번 제대로 이야기도 못했는걸요.“
“첫사랑이 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영영 가슴속에 박제되는 사랑이고요.”
노비산의 솔내음 속으로 오르간 소리에 맞춰 입을 오물거리던 소녀의 얼굴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제가 다니던 계성학교 가까이에 있는 신명여고의 여학생이었어요. 함께 교회에 다녔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여학생을 위해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어요. 한번은 그 여학생이 자두를 한 바구니 가져와 교회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는데, 전 그 자두가 저한테까지 올까 하여 가슴을 졸이며 있었지요. 그러다가 결국 화장실로 달아나 버렸어요. 혹시 자두를 못 받게 된다면 내가 자리에 없었으니 주지 못했을 거라 위안하려고요. 한참 후 돌아오니 오르간 위에 자두 두 알이 놓여 있었어요. 깨끗한 손수건이 자두 위에 덮여 있었지요. 그 자두를 책상 위에 두고 날마다 바라보았어요. 더는 둘 수 없을 만큼 썩고 말라버렸을 땐 꼭지를 따서 그 꼭지를 습자지에 싸서 보관했지요.”
유월의 저녁바람이 태준의 가슴속에 곱게 접어 둔 페이지를 넘기며 지나갔다. 그 페이지 속에서 마른 꽃잎 하나가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꽃잎의 고운 색깔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교회로 가려면 청라언덕을 지나가야 했어요. 여학생은 저녁 예배를 하러 그 길을 지나곤 했는데 전 오르간 연습을 하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언덕으로 가 그 여학생이 지나는 걸 바라보았어요. 손수건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언젠가는 다가올 그 시간을 아껴두고 싶었거든요.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하고 그녀를 기다렸어요. '자두 고마웠어요'라는 말을 수백 번도 더 연습했지요. 라일락 이파리가 잔뜩 두꺼워진 칠월 하순이었는데, 그즈음 그런 말이 유행하고 있었어요. 사랑의 맛을 알려면 라일락 이파리를 씹어보라는. 하지만 라일락 이파리가 어떤 맛인지는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문득 저는 그 맛이 궁금해졌어요. 사랑의 맛이 궁금해졌던 거지요. 손을 뻗어 연한 잎 하나를 떼서 입안에 넣었는데. 아, 그 맛이란! 그건 먹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맛이었어요. 정말이지 죽을 것 같은 맛이었는데 뱉어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 그 기다림이 허사가 되고 말 것 같았거든요. 그때였어요. 멀리 그녀의 모습이 보였어요. 기다림은 그렇게 길었는데 그녀의 걸음은 어찌나 빨랐던지 내가 이파리를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그녀는 내 코앞에 마주 있었지요. 아직도 입안에 가득한 그 맛 때문에 혀가 얼얼하고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지요. 그때 제가 어떻게 한 줄 아세요? 바보 같게도 '라일락 고마웠어요'라고 말하고 말았어요. 어휴, 그렇게 골백번 연습한 말을 두고 라일락이 고맙다니요.”


순진한 아이처럼 귓불이 붉어진 태준을 바라보며 은상은 배를 잡고 웃었다.
“아이고, 도대체 그 이파리 맛이 어땠게요?”
“그건 이 선생님이 직접 맛보셔야 해요. 사랑의 맛이 그런 것이라는 걸 절감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태준은 얼굴을 활짝 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어떻게 한 줄 아세요? 절 보며 웃었어요. 제게 눈을 맞추고 소리 없이 빙그레 웃었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상이 갑자기 생각난 듯 수첩을 꺼내 무언가 끼적이기 시작했다.
“박 선생님, 선생님 곡에다가 그 여학생의 이야기를 담으세요, 그러면 그 소녀와의 사랑을 노래 속에서나마 이룰 수 있지 않겠어요? 제가 가사를 써드릴 테니 곡을 붙여보시겠어요?”
태준은 며칠 전 작곡한 곡을 떠올렸다. 그 음률 속에 푸르던 청라언덕과, 언덕의 붉은 벽돌담과, 붉은 담을 휘감은 푸른 담쟁이와, 그 길을 장난치며 오르던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창포물을 들인 듯 윤기나던 소녀의 검은 눈썹과, 그 눈썹 아래 싱그럽던 소녀의 미소와, 그 위로 헤엄치듯 흐르던 오르간 소리가 태준의 뺨을 조용히 만지고 지나갔다.
잠시 후 은상은 태준의 고향 추억과 눈앞에 펼쳐진 월포 바닷가의 풍경을 담은 시를 건네주었다. 수첩을 받아든 태준의 눈동자가 따스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촉촉이 젖어들었다.
“정말 아름다운 노랫말이군요.”
멀리 파도 속으로 백합 같은 소녀의 희디흰 얼굴과, 저녁 조수로 떠난 흰 새 같은 형의 얼굴이 썰물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박태준

박태준의 가곡 ‘동무생각’의 배경이 된 대구 중구 동산동의 ‘청라언덕’은 대구 근대문화의 중심지다. 그 아래로 3·1운동길, 선교 박물관, 의료 박물관, 90계단, 상화 고택, 약전 골목, 제일교회, 신명학교, 계산성당 등이 이어지면서 대구의 근대 예술가들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 곳이다. 1900년대 대구의 몽마르트로 불리는 이곳은 1899년 그 언덕 아래로 십자가 모양의 계산 성당이 한옥으로 축성된 후 시인 이상화, 화가 서동진과 이인성, 작곡가 박태준 등이 그 언덕을 오가며 한국 근대 예술의 꽃이 된 아름다운 작품들을 피워냈다.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 자를 써서 '푸른 담쟁이 덩굴'이란 뜻을 가진 청라언덕은 당시 박태준이 다니던 계성학교의 아담스관과 맥퍼슨관, 그리고 언덕에 위치한 동산의료원 선교사 사택들이 푸른 담쟁이덩굴로 휘감겨 있는 모습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동무생각'은 박태준(1900~1986)이 마산의 창신학교 교사로 근무할 적에 만들어진 곡으로 동료교사이던 이은상(1903~1982)이 글을 붙인 우리나라 대표적인 가곡이다. 박태준이 계성학교를 다닐 무렵 신명 여학교에 다니던 한 여학생을 사모했는데 내성적인 성격 탓에 끝내 고백하지 못했고, 세월이 흘러 박태준의 애틋한 첫사랑 이야기를 들은 이은상이 즉석에서 가사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 노래 제목이 ‘사우’(思友), 바로 ‘벗을 생각함’이라는 뜻의 ‘동무생각’이다.
수줍은 청년의 로맨스를 간직한 청라언덕의 ‘동무생각’은 당시 청소년들의 애창곡으로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일본 식민지 시절의 노래들이 슬프고 우울한 데 반해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이 노래는 학교 창가나 유행가 외에는 마땅히 부를 게 없던 청소년들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당시 청라언덕에 백합은 없었고 노랫말은 백합처럼 희디흰 얼굴의 그 여학생을 비유한 말이라고 한다.
대구에서 출생한 박태준은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터스칼럼대학, 웨스트민스터 음악대학을 거쳐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오빠 생각' '가을밤' '동무 생각' 등 150여 곡의 동요와 가곡을 작곡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