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변화, 삶과 취향

김계희
2017-11-26
조회수 899


작성일 2009년 2월


  Keren Ann - Au coin du monde - Streets Go Down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굳이 기록할 것은 못되지만 보람찬 여행에서 돌아왔으니 그 변화들에 대해 적어야 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착해지는 기분이 들어 추석 명절을 보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취생이  된것 같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무언가 달라졌다. 첫째는 꽉 차있던 책장이 휑하니 비어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끊임없이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오빠가 저의 책과 씨디들을 다 챙겨간 이유이고, 둘째는 히말라야를 내려온 그날 술이 취해 기억을 잃었던 이유이다.그때 체체파리에게 물렸을 확률이 많다. 변화가 시작되었다.
가까운 시일로는 그저께 열네시간을 자고 일어나 세시간을 활동하다 쓰러져 두시간을 더 자고 한시간 동안 깬 다음 또 아홉시간을 잔 뒤 일어나 종로로 가는 지하철 이십분사이에 일분인지 오분일지 모를 잠을 자고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영화를 보면서 또 잠이 들었는데, 잠이 든 사이 며칠전 오빠에게 권해준 영화가 떠올랐다.

그때 권해준 것이 <타인의 삶>이었어야 했는데 <타인의 취향>이었다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라 잠이 깼다.
잠이 깼을땐 벤자민버튼이 날렵한 오토바이를 타고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인 브레드피트로 돌아와 있었다. 오빠는 내가 말한 감동적인 스토리를 기대하며 그날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관을 나오며 당혹감과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씨네큐브엔 <타인의 삶>과 <타인의 취향>이 요일이 다르게 상영되고 있었다. 그날 상연작은 분명 <타인의 취향>이었다.

그날 술이 취해 기억을 잃었다. 사람들이 나를 방에 데려다 주었는데 방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해드랜턴도 찾을수가 없어 어둠속에서 조금 슬프게 잠든 기억이 어렴풋하다. 사람들이 취한 나를 내동댕이쳐 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히말라야 정기를 가슴에 가득 품고 내려온 희망에 찬 꿈 많은 처녀가 왜 햇살 빛나는 눈부신 아침 난데없이 쓸쓸하고 외로운 생각이 들었겠는가.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낭도 두르지 않은 채 뒹굴어져 있었다. 몸은 차가웠고 열려진 창문 너머로 까마귀가 날고 있었다.

룸메이트는 "걱정하지 말아요.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면 모든 일은 조용히 마무리 될거예요." 라고 FBI같은 대답을 해 주었다. 하지만 진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기에 쓸쓸한 마음 위로 희망적인 생각이 자리 잡았다. 아무튼 그날 밤 체체파리에게 물린 것이 틀림없다. 그 후 끊임없이 잠을 자는 것에 더해 기억이 혼미해지는 증상이 생긴 것이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한기를 느끼고 보일러실에 가니 가스 밸브가 잠겨있었다. 히말라야에서 어젯밤 대구로 돌아왔고, 엄마에게 인사를 했고, 보일러실에 가서 밸브를 열어 놓고 잠이 들었는데, 이상해요 스컬리, 오늘 아침 밸브는 여전히 잠겨 있다는 것이예요.

어젯밤 잠이 들때 행복감을 느꼈다. 이유인즉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사람이 간단히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밤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깨어날 때는 불행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돈을 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란 말이냐고...-.-
행,불행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려야 한다면, 바닥이 곧 따뜻해질거라 믿고 잠이 들면 행복한 거고 다음날 차가운 냉방에서 잤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불행해지는 거다. 아, 이건, 쓰고나니, 원효대사의 해골물과 같은 진리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해버린거다. 멋진거다. 지혜로운 당나귀가 되려는지 깨달음은 빠른 속도로 깊어지고,기억이 더 혼미해지기 전에 추천하고자 하는 영화는 <타인의 삶>이었다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해버릴 거다.




0